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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435
한자 華城 隆陵-健陵
영어공식명칭 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
이칭/별칭 융건릉,융릉과 건릉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 18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성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762년 - 수은묘 조성
조성 시기/일시 1800년 - 건릉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35년 - 사도세자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35년 - 헌경왕후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52년 - 정조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53년 - 효의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62년 - 사도세자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815년 - 헌경왕후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800년 - 정조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821년 - 효의왕후 사망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1년 -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조 초장지 1차 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2년 -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조 초장지 2차 발굴 조사
이장 시기/일시 1789년연표보기 - 영우원을 천장하고 현륭원으로 개칭
이장 시기/일시 1821년 - 건릉 천장
개축 시기/일시 2002년 - 화성 융릉과 건릉 수복방 복원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 26일연표보기 - 화성 융릉과 건릉 사적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76년 -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16년 - 융릉에 헌경왕후 합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21년 - 건릉에 효의왕후 합장
관련 사항 시기/일시 1899년연표보기 -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현륭원에서 융릉으로 격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화성 융릉과 건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현 소재지 화성 융릉과 건릉 -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안녕동 187-1]지도보기
원소재재 영우원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
성격 왕릉
양식 합장릉
관련 인물 사도세자|헌경황후|정조|효의왕후
봉분 크기/묘역 면적 705,653㎡
소유자 문화재청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조선 후기 왕릉.

[개설]

화성 융릉과 건릉은 조선 후기의 왕릉이다. 융릉은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장조의 부인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무덤이고, 건릉정조정조의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위치]

화성 융릉과 건릉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에 있다.

[변천]

화성 융릉과 건릉은 여러 차례의 천장과 합장이 있었다. 먼저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 묘를 쓰고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숭하고, 묘를 원(園)으로 격상하여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다시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수원부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헌경왕후가 1815년(순조 15) 사망하자 1816년에 합장하였다. 영우원은 다시 1899년에 능(陵)으로 격상되어 융릉이 되었다.

한편, 건릉은 1800년에 정조가 사망하자 현륭원 동쪽에 조성하였다. 이후 1821년(순조 21)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가 사망하였는데, 건릉의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장이 결정되었다. 천장한 곳은 원래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합장묘로 조성하였다.

[형태]

융릉 : 능침은 난간석 없이 병풍석만 둘렀다. 병풍석의 면석은 장릉(長陵)[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의 형태를 따랐고, 인석은 연꽃 형태로 조각하였다. 석물은 문·무인석,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2단으로 배치하였다. 융릉의 장명등은 팔각으로, 연꽃과 모란을 비롯하여 불로초, 국화 등 다른 능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꽃을 새겼다. 문인석은 금관조복(金冠朝服)을 갖추었는데, 기존 왕릉에는 없던 도상이다.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무인석은 1789년 현륭원 조성 당시 세운 것인데, 원의 격식에 무인석을 설치한 유일한 사례이다. 표석은 1789년 정조현륭원 천원(遷園) 후 세운 표석 1기와 1900년 고종이 세운 융릉 표석 1기가 있다.

건릉 :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표석은 1800년에 건릉을 처음 조성할 당시 세운 것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1900년 고종이 황제로 추숭하면서 세운 1기만이 남아있다. 건축물은 정자각, 비각, 홍살문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다.

[금석문]

융릉 : 1789년에 세운 표석에는 정조의 친필로 '조선국 사도 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 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쓰여 있고, 1900년에 세운 표석에는 고종의 친필로 '대한 장조 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 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祔左)'라고 쓰여 있다.

건릉 : 고종의 친필로 '대한 정조 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大韓 正祖 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祔左)'라고 쓰여 있다.

[현황]

화성 융릉과 건릉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의 건축물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있다. 또 융릉과 건릉의 수복방이 2002년 복원되었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융릉과 건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정조 초장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초장지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성 융릉과 건릉은 조선 시대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의 예법에 근거하여 공간을 구성하고 시설물을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왕릉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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