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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53
한자 平壤 趙氏
이칭/별칭 바리골 조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한상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평양 - 평양시
입향지 바리골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평양 조씨 집성지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화성 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산26-40 지도보기
성씨 시조 조춘

[정의]

조춘을 시조로 하는 경기도 화성시의 세거 성씨.

[개설]

평양 조씨는 경기도 화성시의 세거 성씨 중 하나이다.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바리골에 모여 사는데, 조선 개국 공신 조준(趙浚)[1346~1405]의 동생 조견(趙狷)[1351~1425]의 후손이다. 조견 역시 조선 개국 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받지 않았다. 훗날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나 자신의 묘비에는 고려의 벼슬만 적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편, 바리골에 거주하는 평양 조씨는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한데, 1644년(인조 22) 무과에 급제한 조유(趙猷)[1613~1665]가 시초로 보인다. 조유는 병자호란 때 아버지 조정익(趙廷翼)과 어머니가 자결하고 본인은 포로가 되는 등의 수모를 겪었다. 이후 조유는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부도사, 황해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유의 손자인 조빈(趙儐)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수원도호부사를 지냈으며, 증손 조동점(趙東漸) 역시 무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조동점의 아들인 조완(趙𡷗) 역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연원]

평양 조씨 시조는 고려 예종, 인종 때 인물인 조춘(趙椿)이다. 북송 멸망 후 고려에 멸망한 북송의 세 왕자 중 한 명이 조춘의 선대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춘의 5세손인 조인규(趙仁規)[1237~1308]가 충선왕의 장인이 된 후 평양부원군에 봉하여지며 평양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인규의 증손은 조선 개국 공신 중 한 명인 조준이다.

[입향 경위]

평양 조씨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에 살면서 대대로 관직을 하였으나, 근대 시기 발생한 경복궁 대화재로 인해 집이 전소하면서 묘역이 있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바리골로 낙향하였다고 한다.

[현황]

평양 조씨는 1985년 인구주택총조사 당시 화성 지역에 118세대 48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조사에서는 968명의 평양 조씨가 확인되었다.

[관련 유적]

평양 조씨 관련 유적으로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리 산26-40 일원에 조성된 평양 조씨 묘역이 있다. '양노리 조세성 묘, 조동점 묘, 조완 묘'라는 이름으로 화성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조세성의 아버지인 조유의 묘도 바리골에 있었는데, 후에 청양 지역으로 이장하였다. 바리골의 평양 조씨 묘역은 16세기 후반 활동한 지관 박상의(朴尙義)[1538-1621]가 명당으로 점지한 곳이라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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