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91
한자 鄭文翼
영어공식명칭 Jung Moon-ik
이칭/별칭 위도(衛道),송죽당(松竹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1년연표보기 - 정문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9년 3월 17일 - 정문익 증광 생원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06년 9월 10일 - 정문익 증광 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11년 - 정문익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정문익 충원현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정문익 해주옥사에 연루되어 진도(珍島)로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23년 6월 - 정문익 숙천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정문익 진무원종공신 녹훈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정문익 소현세자의 분조 호종
활동 시기/일시 1628년 10월 16일 - 정문익 충청도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6년 11월 - 정문익 병자호란 시 군사를 모아 남한산성에 들어감
몰년 시기/일시 1639년 8월 10일연표보기 - 정문익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8년 - 정문익의 문집 『송죽당집』 편찬
출생지 한성부 낙동(駱洞)
묘소|단소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산59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초계(草溪)
대표 관직 충원현감|숙천부사|충청도관찰사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위도(衛道), 호는 송죽당(松竹堂)이다. 아버지는 첨정 정응택(鄭應澤)이다. 정문익의 후손은 송죽당공파(松竹堂公派)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와 중손리에 세거하였다.

[활동 사항]

정문익(鄭文翼)[1571~1639]은 1571년(선조 4) 한성부 낙동(駱洞)에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생원시, 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11년(광해군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사간원 정언·시강원 사서·병조좌랑 등의 중앙관직을 역임하고, 1615년(광해군 7) 충원현감에 임명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1616년(광해군 8) 5월 관직을 버리고 남양(南陽)으로 귀향하였으나, 12월 해주옥사(海州獄事)에 연루되어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나고, 숙천부사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반란군에 대항하여 숙천부사로서 병력을 인솔하고 안주성에 들어가 지켰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소현세자를 호종하여 전주에서 1달간 분조를 호위하였다. 1628년(인조 6) 9월 회답사로 후금을 다녀와 후금의 정세를 보고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 14) 청군이 침입하자, 조익(趙翼)·심지명(沈之溟)과 함께 피란인 500여 인을 모아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1639년(인조 17) 8월 10일 군제(郡齋)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898년 9대손인 정기영(鄭基永)이 목활자로 편찬한 4권 2책의 『송죽당집(松竹堂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지화리 산 59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당시 안주성을 지키고, 토역(討逆)한 공으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