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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95
한자 趙萬元
이칭/별칭 태시(泰始),문정(文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왕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2년연표보기 - 조만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4년 - 조만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02년 - 조만원 승정원승지
활동 시기/일시 1803년 - 조만원 사간원대사간
활동 시기/일시 1805년 - 조만원 이조참의·형조참의·자산부사
활동 시기/일시 1811년 - 조만원 사간원대사간
활동 시기/일시 1812년 - 조만원 이조참판
활동 시기/일시 1813년 - 조만원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
활동 시기/일시 1815년 - 조만원 이조판서
활동 시기/일시 1819년 - 조만원 대사성, 강화유수
활동 시기/일시 1821년 - 조만원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활동 시기/일시 1822년 - 조만원 한성판윤 겸 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
몰년 시기/일시 1822년연표보기 - 조만원 사망
성격 문관
성별
본관 풍양(豊壤)
대표 관직 한성 판윤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태시(泰始), 시호는 문정(文靖).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에 400여 년간 세거한 들목 조씨로, 증조는 조한보(趙漢輔), 조부는 조정우(趙廷禹), 부친은 부사 조상존(趙象存)이며, 모친은 윤근(尹勤)의 딸이다.

[활동 사항]

조만원(趙萬元)[1762~1822]은 1790년(정조 14) 수원 사람만 응시하게 한 문과(文科) 별시(別試)에서 1등으로 선발되었으나, 수원부의 호적에 입적(入籍)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세 번의 식년(式年)에 잇달아 입적된 사람만 응시할 수 있게 한 규정에 따라 방목(榜目)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1792년 친림 응제에서 거수를 하여 직부전시를 받았으며, 1794년 33세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기주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림회권(翰林會圈)과 규장각 초계문신 등에 선발되었다. 부교리·정언·지평 및 이조·병조 낭관을 역임하였고, 초계시(抄啓試)에서 3번 수석을 하여 4품에 오른 뒤 부안현령에 제수되었다. 1802년(순조 2) 승정원 승지를 이어서 1803년(순조 3) 사간원 대사간, 1805년(순조 5) 이조참의·형조참의·자산부사가 되었다. 1810년(순조 10) 총부(摠府)의 변통 초기(變通草記) 문제로 순안현(順安縣) 유배형이 내려졌으나, 외부에 있었다는 이유로 면제되었다. 1811년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812년(순조 12) 이조참판, 1813년 비변사 제조에 차제(差除)되었으며,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1815년 이조판서, 1816년 이조참판, 1817년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1818년 청나라에 부사로 다녀왔다. 1819년 대사성을 거쳐 강화유수가 되었고, 1821년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북경에 다녀왔다. 1822년에 한성판윤 겸 지경연사(漢城判尹兼知經筵事)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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