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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45
한자 唐城郡
영어공식명칭 Dangseong-Gun
이칭/별칭 당은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5세기 후반 - 당성군 설치
개정 시기/일시 757년 - 당성군에서 당은군으로 개칭
개정 시기/일시 829년 - 당은군에서 당성진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고려 초 - 당성진에서 당성군으로 개편
개정 시기/일시 1018년 - 당성군을 수주의 속군으로 삼음
개정 시기/일시 1290년연표보기 - 당성군에서 익주로 승격
관할 지역 당성군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지도보기

[정의]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지역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당성군(唐城郡)은 5세기 후반에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후,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이다.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구려 당시부터 당성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당성군의 '당(唐)' 자는중국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당나라는 신라가 당성군을 차지한 이후인 618년에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성군의 한자 표기가 고구려 당시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당항성(党項城)[화성시 서신면 구봉산 정상에 남아 있는 '화성 당성'으로 비정됨]에 주목하면, 당성군의 고구려 시대 이름은 당성(党城) 내지 당항(党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 기록]

당성군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당은군은 본래 고구려 당성군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옛 이름으로 회복되었다.”라고 당성군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의 양광도(楊廣道) 편에는 “당성군은 본래 고구려 당성군으로, 신라 경덕왕 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현종 9년에 수주(水州)의 속군(屬郡)이 되었으며, 뒤에 인주(仁州)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16년에 홍다구(洪茶丘)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또 승격하여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가 되었다. 충렬왕 34년에 다시 승격하여 익주목(益州牧)이 되었다. 충선왕 2년에 여러 목(牧)을 도태(淘汰)시키면서 강등되어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고려사』와 유사한 내용을 서술한 후,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삼았다는 내용을 추가하였다.

[변천]

당성군은 5세기 후반에 처음 설치된 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겪었다. 우선, 553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신라가 백제를 통합한 이후 지방 제도 정비 과정에서 한산주(漢山州)에 속하게 되었다. 한산주는 신라가 설치한 9개의 주 가운데 하나로, 소경(小京) 하나와 27개 군, 46개 현을 관장하였다. 당성군도 한산주가 관할하는 27개 군 가운데 하나였으며, 영현은 상홀현(上忽縣)[차홀현(車忽縣)이라고도 함]과 부산현(釡山縣) 2개였다. 상홀현과 부산현은 모두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일원에 비정된다.

당성군은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당은군으로 개칭되었다. 823년(헌덕왕 15)에는 당은군과 수성군을 통합하였다고 하는데, 통합의 이유나 목적은 분명히 알기 어렵다. 당은군과 수성군을 통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829년(흥덕왕 4)에는 당은군을 다시 분리하여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는 당성진(唐城鎮)을 설치하였다. 한편, 당성군 관내에 있던 당은포는 신라에서중국으로 출발하는 기항지이자 국제 무역항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이후 당성진은 고려 초에 당성군이라는 옛 이름을 회복하였으나, 신라에 비해 입지적 중요성은 현저히 감소하였다. 대중국 해상 교통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수도 개경 인근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당성군은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군에 머물렀다. 1018년(현종 9) 수주[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과 수원시 일대]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인주[지금의 인천광역시]로 이속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후기인 1172년(명종 2)부터 감무가 파견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속군의 지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당성군 출신의 홍다구[1244~1291]가 원나라에서 정동행성(征東行省) 우승(右丞)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당성군에서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익주는 이후 강녕도호부, 익주목 등으로 변천을 거듭하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당성군은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 교통의 길목을 관장하고 행정적으로 통제하는 중요 거점이었다. 신라는 당성군 일대를 장악한 후 당나라와의 직접 통교가 가능하여졌고, 이는 신라가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발판이 되었다. 신라는 남북국 시대에도 당성군에 있던 당은포를 통해 당나라와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를 이어가며 번영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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