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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81
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철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발발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휴전 협정 체결
전개 시기/일시 1950년 7월 5일 - 6·25전쟁 죽미령전투 발발
종결 장소 판문점 -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이승만|김일성|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해리 S. 트루먼|더글러스 맥아더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남한과 북한의 전쟁.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한반도에는 38선을 경계로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좌우합작 등 통일된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1947년 이후 미·소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결국 38선 이남과 이북에 각각 대한민국 정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분단이 공식화되었다.

정부 수립을 마친 북한은 미·소 양국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서 먼저 철수하였으며, 미국은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을 잔류시키고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그러나 남북한의 대립은 격화되고 있었는데, 브루스 커밍스는 전쟁 이전 38선 인근에서 이미 내전 상태라고 할 만한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고 보았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남침하였다. 북한의 남침은 소련과중국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점령당하였으며, 이승만 정부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7월 14일 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미극동군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넘어갔다. 7월 20일 대전이 점령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마산·왜관·포항 일대까지 북한군이 내려와 낙동강을 넘으려 하였다.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한 대부분이 북한군에 넘어간 상황에서, 북한군은 ‘패잔병 소탕’과 수송을 위해 107연대를 편성하였다. 107연대는 경기도, 충청남도 천안·아산, 충청북도 진천 일대를 담당하였다.

107연대는 북한의 군사위원회가 남한의 점령 지역에 조직한 방어위원회에 방어선 구축 등 지시를 내릴 권한이 있었다. 화성 지역은 아산만과 남양 지역이 1950년 8월 21일 107연대의 명령 지역이 되었다. 이에 영흥도부터 아산만까지 해안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며, 107연대 32대대가 남양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8월 26일에는 27대대도 남양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남양 지역은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여 부대를 배치하는 주요 지점이었던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9월 28일에 화성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5월 이후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일진일퇴의 고지전이 반복해서 이루어지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3년간 계속된 전쟁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죽미령전투]

죽미령전투[오산전투]는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5일, 미군 스미스특수임무부대와 인공군이 경기도 화성군 오산면[지금의 경기도 오산시] 죽미령에서 벌인 전투이다. 북한의 기습 남침 후 한국 정부의 지원 요청이 있자, 미국 정부는 주일 미군을 우선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부족한 병력을 확충하여 한국까지 투입하는 시간을 벌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 중이던 제24사단 각 부대에서 병력을 선발한 뒤, 찰스 브래포드 스미스(Charles Bradford Smith) 중령의 지휘 아래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였다.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남하 중인 북한군을 막기 위해 7월 5일 오전 3시 죽미령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7월 5일 오전 6시에 오산 방면으로 남하를 시작한 북한군 제4사단과 105사단은 오전 8시에 죽미령의 미군을 지나쳐 남하에 성공하였다. 이후 오전 11시 45분에 북한군 제4사단이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포위하듯 감싸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스미스특수임무부대는 일본에서 급하게 출발한 까닭에 무기와 병사 모두 부족하였던 상황이었다. 결국 스미스 중령은 7월 5일 오전 2시 30분 퇴각을 결정하였다. 죽미령전투에서 미군 보병 150명, 포병 31명이 사망하였으며, 스미스특수임무부대 B중대는 후퇴 지시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해 많은 인원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매향리 쿠니사격장]

매향리 쿠니사격장[Koon-ni range]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에 1952년부터 2005년까지 있던 미 공군의 폭격장이다. '쿠니'란 매향1리·매향5리의 옛 지명인 고온리의 미국식 발음이다. 매향리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에 매향리 농섬에 미군의 첫 포격이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1952년부터 미군이 고온리 해변에 군용 막사를 치고 주둔하였으며, 이후 주변 69만 4,214㎡를 징발하고 막사를 옮기며 점차 사격장으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쿠니사격장은 휴전 이후에도 미국 태평양사령부 제7공군뿐 아니라 아시아 주둔 미군 공군기의 폭격 훈련장으로 활용되었다. 쿠니사격장은 2005년 8월 12일 폐쇄되기까지 54년 동안 매향리 주민들에게 극심한 소음·오폭 피해를 주었다.

[결과]

3년 동안 진행된 6·25전쟁은 남북한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남북한을 합친 한국인의 인명 손실은 520만 명이었으며, 특히 민간인의 인적 손실이 유례없을 만큼 컸다. 이산가족이 1,000만 명 이상 발생하였으며, 한반도 전체의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도로·교량·항만·철도 등 사회 경제적 기반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남한에서는 이승만 반공 독재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미군의 주둔과 원조 중심의 경제 지원을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갑산파가 연안파·남로당계·소련파 등을 숙청하고 김일성 유일 지도 체제가 강화되었으며,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로 돌입하였다.

6·25전쟁은 화성 지역에도 큰 피해를 끼쳤다.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화성을 포함한 수원 지역에서 131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치안 기관이나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지방 좌익에 의해 최학렬(崔學烈)과 최학렬의 가족, 차병설(車炳卨), 송범주(宋範周), 홍수천(洪壽天), 차순석(車舜錫), 유범렬(劉範烈), 허진(許鎭) 등이 희생당하였다. 또한 전쟁 이전에 좌익 활동에 가담하였거나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군에게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김경환(金慶煥), 이정남(李正男) 등이 희생당하였다. 또 향남읍 발안리에 거주하였던 박세철은 인민군 철수 후, 인민군에 부역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원·화성 지역은 한강 이남의 첫 도시로서 전쟁을 피해 내려오는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특히 1·4후퇴기에 화성 지역에 피난민이 대거 정착하여 지금의 봉담읍 수영리, 서신면 장외리, 송산면 신천리, 배양동, 향남읍 행정리 등 다섯 곳에 피난민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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