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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감로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399
한자 龍珠寺 甘露圖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90년연표보기 - 용주사 감로도 제작
현 소장처 용주사 효행박물관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지도보기
성격 불화
소유자 용주사
관리자 용주사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불화.

[개설]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효행박물관에 소장중인 감로도이다. 감로도는 효와 관련된 설화 경전인 『우란분경(盂蘭盆經)』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감로도는 돌아가신 목련존자 어머니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효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귀도의 중생을 감로를 통해 구제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감로도는 16세기에 도상이 성립되어, 16~17세기 이후의 수륙재(水陸齋), 우란분재(盂蘭盆齋)등 영혼천도 의식 때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 감로도 하단 여백에는 화기(畫記)가 금니로 적혀있다. 화기와 더불어 감로도의 내역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성록』 의하면 용주사 감로도는 1790년에 제작되었다. 황덕순과 윤흥신이 감동하였으며 김홍도, 김득신, 이명기를 비롯한 도화서 화원과 화승들이 함께 제작하였다. 본래 대웅보전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1984년 3월 1일 도난당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18년 되찾아 다시 용주사에 모셔졌다.

[형태 및 구성]

용주사 감로도의 상단에는 칠여래와 보살들이 묘사되어있다. 중앙에는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를 중심으로, 다보여래(多寶如來), 보승여래(寶勝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信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좌우 3존씩 대칭으로 등장한다. 이 칠여래 왼쪽으로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화려한 모습으로 있으며, 오른쪽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각각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할 수레를 이끌며 내영하고 있다.

그 아래에는 각종 공양물을 올린 시식단(施食壇)이 마련되어있다. 단 앞에는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스님들이 있고, 스님 옆에는 고혼(孤魂)의 아귀를 매우 커다랗게 표현하여 강조하였다.

아귀 좌우에는 지장보살의 교화를 듣고 지옥문을 나오는 중생들의 모습과, 사당패의 모습, 활과 창 등을 들고 싸우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부터, 글을 배우는 모습,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나무 그늘 아래 갓을 쓰고 있는 선비의 모습까지 일상생활의 풍경을 묘사하였다.

[특징]

용주사 감로도는 다른 감로도에 비해 화폭의 폭이 2배 정도 길다. 긴 화폭은 좌우 대칭구조로 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소나무, 암석, 물결이 청록산수 화풍으로 그려졌다. 소나무는 좌우 대칭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구도가 대칭으로 부각된 불교미술은 용주사 감로도가 거의 유일하다. 자연묘사는 청록산수 풍으로 하였는데, 이는 18세기 궁중 장식화에서 주로 활용된 기법이다. 특히 좌우 대칭적 구도는 조선시대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연상시킨다.

일반적으로 감로도가 상단·중단·하단의 3단 구성으로 만들어진 반면, 용주사 감로도는 중단과 하단의 경계가 모호한 2단 구성을 하고있다. 따라서 하단에 묘사된 아귀는 다른 감로도에 비해 그 수가 줄어들었으며, 일반적으로 구현되는 죽음장면과 지옥묘사도 축소되거나 그려지지 않았다. 감로도 하단의 그려진 환난 장면은 감로도의 중요한 주제로 약 40여 개의 환난장면이 묘사된 것도 있으나 용주사 감로도의 경우 단 10가지만이 표현되었다. 그에 반해 감로도 상단 좌우에 천녀들이 들고 있는 벽련대반(碧蓮臺畔)은 다른 감로도에 비해 크게 강조되어있다. 벽련대반은 인로왕보살이 무주고혼의 혼백을 극락으로 천도하는데 사용되는 기물로 중생에 대한 구제를 상징한다.

지옥도상과 죽음장면의 축소와 벽련대반의 강조 등으로 보이는 용주사 감로도의 특징은 백성의 고난을 최소화하고 선정을 베풀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용주사 감로도는 1790년 도화서 화원과 화승들이 함께 제작하였으며, 동시대의 다른 감로도와는 구도와 내용에서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용주사의 실질적 창건자인 정조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이며, 도화서 화원과 화승들과 협업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용주사 감로도는 18세기 감로도의 다양한 형식 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후기 왕권과 불교의 관계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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