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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69
한자 洪彦弼
이칭/별칭 자미(子美),묵재(默齋),문희(文僖),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76년연표보기 - 홍언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홍언필 문과 급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진도로 귀양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홍언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저작(著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13년 - 홍언필 장령으로 특진하고, 응교·직제학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홍언필 우부승지 재임 중 기묘사화에 연루됨
활동 시기/일시 1524년 - 홍언필 도승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29년 - 홍언필 이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34년 - 홍언필 우찬성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35년 - 홍언필 아들 홍섬이 유배되자, 파직됨
활동 시기/일시 1537년 - 홍언필 호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4년 - 홍언필 영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5년 - 홍언필 을사사화에 가담
활동 시기/일시 1548년 - 홍언필 좌의정·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음
몰년 시기/일시 1549년연표보기 - 홍언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49년 - 홍언필 인종 묘정에 배향
묘소|단소 화성 홍법리 남양홍씨 묘역 - 경기도 화성시 홍법사길12번길 34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남양
대표 관직 도승지|대사헌|호조참판|이조판서|좌의정|영의정

[정의]

경기도 화성시를 세거지로 하는 남양 홍씨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미(子美), 호는 묵재(默齋)이다. 동지중추원사를 지낸 홍익생(洪益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를 지낸 홍귀해(洪貴海)이고, 아버지는 승지 홍형(洪泂)이며, 어머니는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의 딸이다. 부인은 둘인데 군수(郡守) 정숙은(鄭叔垠)의 딸과 초혼(初婚)하였고, 계실(繼室) 송씨(宋氏)는 영의정 송일(宋軼)의 딸이다. 자식은 1남 1녀로,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이고, 딸은 돈녕도정(敦寧都正) 윤진(尹珍)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홍언필(洪彦弼)[1476~1549]은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504년(연산군 10)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진도로 귀양갔다가 중종 반정 이후 사면되었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저작(著作)을 맡은 다음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509년 부교리로 승진한 뒤 지평·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장령으로 특진하고, 이어서 응교·직제학 등을 지냈다. 1519년 병조에서 참지·참의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재임 중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때 조광조(趙光祖)와 내외종 간이어서 그 일파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났다. 1524년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원악향리(元惡鄕吏)들이 외방의 공물(貢物)을 방납하는 것을 단속하였다. 그 뒤 호조참판을 시작으로 참판을 다섯 차례 역임하였다. 1529년 이조판서 재임 중 인사를 공정히 처리하였다. 이어 형조판서·병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대사헌을 여섯 차례나 지내면서 관기를 바로잡는 데 공헌하였다. 1534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1535년 아들 홍섬(洪暹)이 김안로(金安老) 등을 논박한 일로 흥양(興陽)에 유배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남양(南陽) 서촌(西村)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1537년 김안로가 물러나자, 다시 호조판서로 임용된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44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해 인종이 즉위하자, 유관(柳灌)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하였다. 1545년(명종 1)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가담하여, 추성 협익 정난 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에 책록되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548년 좌의정·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49년(명종 4) 74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고,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문집으로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35년 간행한 『묵재집(默齋集)』이 있다. 후손 홍사철(洪思哲)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서문과 권말에 사철의 발문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홍법사길12번길 34에 있는 화성홍법리남양홍씨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545년(명종 1)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에 책록되고,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1548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사후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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