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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906
한자 儒敎
이칭/별칭 유교,유학,성리학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기중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공자 사상과 관련해 이루어지는 학문 및 의례 활동.

[개설]

유교는 삼국 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져 보편화되었다.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세워 유교적 교육을 실시했고 백제는 일본에 왕인 박사를 파견하여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고, 신라는 국학을 세웠다. 삼국의 유교교육으로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등 시문에 능하고 경전과 사기에 통달한 유학자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시대에도 이어졌다. 고려는 불교국가를 지향했음에도 국자감을 세워 유교경전의 교육을 실시했고, 고려 말에는 안향이중국에서 성리학을 수입해 성균관과 문묘를 세웠다. 그 결과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는 사대부 층이 조성될 수 있었다.

성리학을 교육받은 사대부에 의해 세워진 조선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국가통치 이념으로 채택하고 정치체제부터 사회생활의 모든 면을 규정하는 틀로 이용했다. 화성 지역에서는 고려말 향교의 설립과 석전제, 향사례 등 유교의례의 시행, 서원과 사우의 건립 등으로 유교가 보급되었으며, 저명한 유학자들로부터 유교문화가 융성해졌고,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충(忠)과 효(孝)의 가치를 잘 보여준 이들을 정려함으로써 유교사상을 생활 속에 확산시켰다.

[화성 지역의 유교건축물과 유교제례]

유학은 인간의 도리와 통치자의 이상적인 군자도(君子道)의 실천, 즉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실천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조선에서는 유학을 각 지방에 확산시키고, 그를 통해 지방통치에 필요한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지방사회에 여러 형태의 유교건축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선현에 대한 제례를 실시했다. 오늘날 화성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서도 향교와 서원, 사우로 대표되는 유교건축물이 세워졌다. 1291년(고려 충렬왕17) 당시 수원 지역이었던 봉담면에 수원향교가 설립되었고, 1397년(조선 태조6)에는 남양향교가 세워졌다. 이 두 향교에는 공자를 비롯한중국의 여러 성현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를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석전제와 향음례 등의 제례를 통해 선유(先儒)에 대한 향사를 실시하고 있다. 화성 지역에는 각 가문의 현조(顯祖)와 마을의 향선생(鄕先生)을 배향하는 서원도 다수 건립되었다. 1660년(현종1)에 설치된 명고서원조익(趙翼)과 그의 후손을 배향했으며, 안곡서원은 1669년(현종7) 기묘명현 중 1인인 박세희(朴世熹)를 봉안, 향사했다. 또한 매곡서원은 1695년(숙종21)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했다. 한편 사우로는 궐리사(闕里祠)가 대표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공자를 봉사하였으며, 정조가 직접 사액하기도 했다. 각 지방의 양반들은 유교건축물에서 선현에 대한 제례를 주관함으로써, 향촌사회와 향촌민을 유교적으로 교화하고자 했다. 그들은 교화의 주체로써 향촌지배를 위한 유교적 권위를 갖출 수 있었다. 화성 지역의 유교건축물과 그곳에서 실시된 제례 역시 화성 지역 양반들에게 유교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지방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 지역의 유학자]

유교사회에서 유학자는 지방사회의 공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유교사상의 확산과 유교문화의 확립을 주도하였다. 화성 지역에서도 다수의 유학자들이 이러한 역할을 함으로써, 유교적 통치체제와 생활양식을 확립하는 데에 일조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시인인 홍유손(洪裕孫)[?~1529]은 다수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홍유손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유교경전을 통독했으며, 당시 학문과 문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시를 배웠다. 홍유손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스스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했으며, 무오사화(戊午史禍)로 스승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할 때에는 사림으로써 제주도로 유배되기도 했다. 홍유손의 문학작품은 다른 유학자들의 문학과는 달리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홍유손의 작품은 조선후기 중인계층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여항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또 한 명의 화성 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우성전(禹性傳)[1542~1593)을 들 수 있다. 우성전은 퇴계 이황의 수많은 제자 중에서 실력이 뛰어나 중앙정계에서 사림들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성전은 1583년(선조16)부터 2년여 동안 중앙관직에 있으면서 『추연선생일기』를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유학자들의 정치활동과 그에 반영된 정치사상이 담겨있다. 우성전은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리학과 예학에 대한 일련의 저술을 남겨 서울, 경기 지역 문인들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561년(명종16) 과거에 합격해 언관직을 역임하였고, 선조대 사림세력의 동서분당과 남북분당의 중심에 위치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우성전은 지금의 화성 지역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해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화성 지역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농업개혁론을 주장한 인물도 존재했다. 바로 우하영(禹夏永)[1741~1812)이다. 우하영우성전의 직계 7대손으로, 향촌지식인으로서 학문적인 성취의 결과물을 여러 편의 저술로 남겼다. 그는 당시 향촌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실학에 바탕한 농업개혁을 주장했다. 우하영은 농촌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소농이 농업생산에 제대로 활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향촌사회에 농관(農官)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농업기술의 개발과 소농에 대한 보급의 임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때 우하영은 농관의 역할을 지방의 양반이 맡도록 했는데, 이는 향촌사회에서 양반의 역할을 증대시켜 양반 중심의 향촌 질서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우하영은 향촌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부세제도 및 구휼제도의 개선, 향약의 실시와 소학의 고강(考講) 등을 제시해 실질적인 개혁과 풍속의 교화를 동시에 진행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처럼 화성 지역의 유학자들은 향촌사회의 운영을 주도하는 동시에 학문적으로 유교사상의 확산을 의도했고, 나아가 유교문화의 확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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