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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특성-진도읍성의 축조와 변화, 그리고 해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1044
한자 珍島邑 城內里-特性-珍島邑城의 築造와 變化, 그리고 解體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호기박철웅황금연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198
인구(남) 492명
인구(여) 499명
가구수 411가구

[진도읍성의 축조와 변화, 그리고 해체]

진도읍성은 1987년 1월 15일에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143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1440년(세종 22)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의 진도읍성성내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군면 고성리에 있었다. 고성리에 있던 진도읍성은 백제시대에 처음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읍성이 조성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곳은 진도의 치소(治所)로서 기능을 했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심각한 인적,물적 피해를 경험했던 진도사람들은 1350년경 영암으로 이주했고, 이후 진도에서 가까운 해남 삼산면으로 이주했다.

해남에서 진도가 분리된 것은 1437년이었다. 진도가 해남에서 완전 분리되어 독립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가흥현의 호장세력이 옛 읍성을 지배했다. 옛 읍성은 지리적으로 보면, 진도의 북동쪽에 치우쳐 있고, 좁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어 최적의 장소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옛 읍성이 오랫동안 진도의 치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이 인접해 있고, 주변 해안 지역에 이미 수군진이 설치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의 방어에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진도읍성이 현 위치로 이설한 것은 이로부터 3년 후였다. 진도읍성의 이전은 세종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최윤덕(崔閏德)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윤덕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비롯하여 함경도, 평안도의 읍성 축조를 관장한 경력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1440년은 진도읍성의 이설을 결정한 시점이고, 이 성이 언제 완전한 형태로 축조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진도읍성의 둘레가 1,600m, 높이가 11자, 3개의 문을 두었던 점을 감안할 때, 최소한 몇 년은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점은 1446년(세종 26) 이전에는 진도읍성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진도읍성의 축조에 필요한 인력은 인근 육지의 3~4개 읍, 혹은 5~6개 읍으로부터 차출되었다. 이러한 축조방식을 ‘통력합축(通力合築)’이라고 일컫는다. 통력합축에 의한 축조방식에서 성이 위치한 마을의 인력에 의해 축조를 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진도읍성은 통력합축이라는 방식을 따랐다는 점에서 예외였다.

물론 이때의 진도읍성이 모든 시설을 갖추었던 것은 아니었다. 옹성, 치, 해자, 관아건물 등의 부속시설들은 그 뒤에 보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60년경에 제작한 『여지도서』에는 진도읍성은 옹성이 14개, 치첩이 58개, 성 안 연못의 깊이가 5자, 둘레가 4,500자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도읍성이 진도의 치소로서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451년(문종 1)부터 이를 해남의 황원으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유는 마을민들이 요역과 방어 임무를 기피하고 유랑하는 사람들이 많고, 물길이 험하여 변란이 발생할 때 구원할 방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부는 진도군을 황원으로 이전한 대신 이곳은 전용 말 목장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1453년(단종 11)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읍성 축조를 주관하였던 우의정 정분(鄭苯)을 현지로 파견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진도에 가지 못했고, 결국 관직에서 물러남에 따라 이 계획은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원래의 계획을 취소하지 않고, 1461년(세조7)에 경차관(敬差官)에 복승리(卜承利)를 임명하여 치소 이전을 강행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황원의 토지가 협소하여 이주민을 전부 수용할 수 없고, 이주로 인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며, 목장을 활용하여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적을뿐더러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는 차원에서 진도군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중단된다. 그리하여 1895년(고종 32)에 진도읍성이 폐지될 때까지 치소로 사용되었다.

현재 진도읍성은 동서남북의 벽 모두에서 그 흔적이 확인되지만, 대부분 파괴되었고 일부만이 남아 있다. 흔적은 북벽 280m, 동벽 100m, 남벽 13m, 서벽 56m가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성벽의 통과선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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