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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마을-역사와 언어-전설과 유물유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3006
한자 郡內面 龍藏마을-歷史와 言語-傳說과 遺物遺跡
이칭/별칭 용정,오룡쟁주,오룡장주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용장마을
집필자 황금연

[용장리의 전설과 유물 유적]

① 오룡장주(五龍藏珠), 오룡재주(午龍爭珠) 이야기

옛날부터 군내면 용장리 경내는 오룡이 장주(藏珠)하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고 전해오고 있었다. 약 200년 전에 일지승(一指僧)이란 이름난 도승(道僧)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진도로 들어왔다가 노환이 생겨 진도읍내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곤란한 지경에 빠졌는데 모두 못 본 척하였다. 그러나 조그마한 여막(旅幕) 집을 경영하는 황무내미란 사람이 이를 유달리 불쌍히 여겨 자기 집에 묵게 하고 극진히 간호를 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게끔 하였다.

이 은혜를 못 갚아 민망해 하던 일지승(一指僧)이 황씨를 불러 “내 은혜 갚을 길이 없으니 내가 보아둔 오룡장주나 가르쳐주고 가려하니 그리 알라.” 하고 “다만 내가 걷기 어려우니 가마(駕馬)를 준비하라.” 하였다. 황씨는 좋아하여 가마를 준비하였다.

황씨가 일지승을 가마에 태우고 용장(龍藏)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여 가는데 지금의 오일시까지만 가면 가마를 타고 있는 노승이 의식을 잃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도로 진도읍내로 가마를 돌려 오는데 석현(石峴: 돌고개)만 넘으면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번, 결국에는 용장에 가지 못하게 되자 일지승은 “네 복이 아닌 것을 하늘이 막으니 하는 수 있느냐?”하면서 섬을 떠나고 말았다. 그 오장주는 쓰지도 못하고, 그 때문에 오일시는 ‘무내미’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진도군지』(1999)에 실린 것인데, 원뜻을 살려 현대어로 고쳤음을 밝힌다.)

② 지심뫼[지신매]에 얽힌 전설

이 뫼(山)는 군내면 용장리 동부에 서향(西向)으로 돌출(突出)한 산인데, 아득한 옛날에 도통(道通)한 도사(道師)가 뾰족하니 돌출되어 있으니 이 산을 주산(主山)인 관음봉(觀音峯) 밑에서 단절(斷切)하여 옮기고자 하였다. 하여 지금의 둔전저수지 밑의 방조제 자리로 옮기기 위해 현칭(現稱)‘목넘어’를 잘라서 산을 회초리로 “가자, 가자 어서가자.”하고 짐승 몰듯이 때려 모니 과연 산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막 움직이려는 찰나 애기를 배서 배(腹)가 섬덩이 같은 여자가 때마침 이를 보고 “어허, 산이 다 걸어가네.”하고 소리쳤다 한다. 그러자 산만 보느라 여념이 없었던 도사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과연 이와 같았다. 도사는 대단히 낙심(落心)하면서 “요망스런 계집년 보지를 말거나 보려거든 애기나 배지 말았거나.” 하면서 회초리를 집어 던지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몰론 기동(起動)하던 산은 도로 그 자리에 멈춰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때 절단했던 자국이 지금도 북과 남으로 넘어 다니는 소로(小路)가 되어 남아 있으며, 그때 났던 피가 백혈(白血)이었다 해서 지금도 거기는 백토(白土)가 난다.

지산면 계암(繼岩)의 예와 마찬가지로 이 산으로 막으려던 자리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당시 도사의 한을 풀었다고 할 수 있으니, 기이(奇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③ 보물창고 ‘맘바등’ 전설

맘바등이란 암산(岩山)은 군내면 용장리 서편에 있는 흑색의 큰 바위이다. 옛적하고도 옛적, 그 바위에 신선이 살았고 그 바위 속에 큰 창고가 있어 진물보물(珍物寶物)이 만고(滿庫)되어 있었다.

이 보고(寶庫)의 출입은, 도선(道仙)이 가지고 있는 ‘억달새’ 같은 풀로 주문(呪文)을 읽으면서 탁 때리면 큰 암문(岩門)이 열렸다고 전한다. 지금은 신선(神仙)이 잠적했기 때문에 열지 못하며 장차 신선이 나타나서 암문(岩門)을 열 것이라고 용장사람들은 믿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용장사람들을 함부로 깔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까닭은 미래에 이 보고(寶庫)가 열려서 부자가 되었을 때에 일을 생각해서이다.

④ ‘망바위’에 얽힌 이야기

군내면 용장리 방북(현 오룡 초등학교)의 주산(主山)인 대암석(大巖石)을 「망(望)바위」라 전(傳)하고 현재도 그렇게 칭하고 있다. 이는 전설이라기보다 고려중엽의 삼별초의 난 때 왕온군사가 이 바위에 올라 수송(輸送)하는 세곡(稅穀)이나 보물을 압수강탈(狎收强奪)하기 위하여 망(望)을 보던 터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과연 이 암상(岩上)에 오르면 동남쪽인 마로해(馬老海)와 북방의 시아해(時牙海)가 한눈에 들어온다. 즉, 선체(船體)를 발견하면 벽파항에 신호로 연락하여 곧 출동할 수 있게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장사(龍藏寺)

『진도군지』(1999)에 용장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인용한다.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속칭 ‘미륵등’에 고려시대 용장사의 석불삼존이 두안부(頭顔部)가 파절(破絶)된 채 목부터 하반신이 남아 있었다. 당국이나 동리에서 미처 관리하기 전에 완도군 출신이라 자칭하는 청년이 나타나 무단히 작업을 시작하여 1962년에 동리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 초옥(草屋)을 짓고 용장사라 이름하였다.

그 동안 관리자(住持)가 두세 번 바뀌었으며 1999년에는 본동 거주 여승이 관리하였다. 조사 당시인 2006년 7월에는 정근조라는 승녀가 용장사 를 관리하고 있다.

⑥ 관찰사비[碑石]와 불망비(不忘碑)

관찰사비는 용장마을성 주변에 있다. 용장마을의 자료에 의하면 1898년 관찰사와 군수 백씨의 불망비(不忘碑)가 함께 있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관찰사비와 불망비를 아울러 관찰사비 또는 불망비로 부른다.

⑦ 곽윤배 처 밀양박씨절의비

절의비의 비는 용장마을성 주변에 있다. 현재 용장마을 이장인 곽재설의 4대 조모이다.

용장사 석조삼존석불

새로 지은 용장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데 광배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동체도 원형이 아닌 시멘트로 복원되어 원형을 찾기 어렵다. 다만 대좌가 원형대로 남아 있다. 1972년 1월 29일 지방유형문화재 17호로 지정되었다.

⑨ 동계안

마을회관에 동계안(천·지·인) 3권이 보관되어 있다. 동계안 외의 문서도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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