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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병마을-특성-망제-거릿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4040
한자 郡內面 德柄마을-特性-望祭-거릿제
이칭/별칭 덕저리,떡저리,덕병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삼거리 길에서 모시는 거릿제]

당집에서 제사가 끝나면 다시 제관 일행은 굿을 치는 사람들과 더불어 마을 앞 삼거리 길에 차일을 쳐둔 거릿제터로 향한다. 예전에는 이때 마을길 양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왔으며, 길굿을 멋있게 치고 놀았다 하는데 요즈음은 구경을 나온 마을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차일 속에는 거리신에게 바칠 제상을 차린다. 과일과 나물, 메와 국, 그리고 제주 등 간단하다. 거릿제는 거리를 떠도는 귀신들[客鬼]을 위한 제사이다. 덕병마을 말고도 진도에서는 동제를 모시면서 흔히 거릿제를 모시는 곳이 많고, 동제라는 이름 대신에 거릿제라고 이름하는 곳이 많다. 덕병에서는 거릿제를 모시게 된 까닭을 삼별초와 연결시키고 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성과 궁을 짓고 항몽전쟁을 벌였던 용장산성이 이곳 덕병마을과는 불과 10여㎞ 거리밖에 안된다. 당시 이곳 덕병마을은 죄인들을 참살하던 곳이었는데, 일설에는 배중손 장군이 몽고군과 내통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이곳에서 죽였다고도 하고, 반대로 배중손 장군 퇴각 후에 몽고군이 삼별초의 동조세력들을 이곳에서 죽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마을에 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기 위해서 매년 거릿제를 모신다고 한다.

전설로 전해오는 말이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진도지역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큰 전란을 겪을 때마다 전장의 중심에 섰던 것은 사실이다. 고려조 몽고군의 침략과 삼별초의 항몽, 조선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곳이기도 하며, 최근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말 동학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로 진도가 알려져 있다. 덕병마을에서는 거릿제를 삼별초와 연결짓고 있지만, 굳이 이것이 아니더라도 한국 전란사에 있어서 진도의 위치는 특별하며, 그런 까닭에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동제에서 거릿제가 확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차일 안에서 제사는 제관들이 올리며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소지를 한다. 축문은 간지와 제관의 성명만 바꾸어 가며 매년 같은 내용을 새로 한지에 써서 사용한다. 독축이 끝나면 태워버린다. 거릿제의 축문은 아래와 같다.

차일 안에서 소지를 하고 나온 제관들은 헌식을 한다. 한 사람이 앞서서 짚을 깔고 가면 뒤에 한 사람은 잡곡을 섞어 쑨 죽을 그 위에 뿌린다. 길 양쪽으로 10군데 이상을 이렇게 한다. 본래 거리를 떠도는 귀신들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기 때문에 길 위에 헌식을 하여 불쌍한 귀신들을 먹여주는 것이라 한다. 헌식을 하는 사이에 굿을 치는 사람들은 맹렬하게 굿을 치며 논다.

헌식을 하는 곳에서 굿을 치던 농악대는 길굿을 치면서 장승이 서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때 앞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영기(令旗)며 창 등을 들고 귀신을 몰아가는 시늉을 한다. 헌식을 하여 객귀들을 배불리 먹인 후에 마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드라마가 이루어진다. 굿도 점점 빠르고 맹렬해진다. 예전에는 12시경에 장승으로 향해갔으나 요즈음은 전반적으로 제사가 간소화되고 참여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9시에서 10시 사이에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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