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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마을-특성-운림산방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5045
한자 義新面 斜上마을-特性-雲林山房
이칭/별칭 비끼내,빗내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복

[운림산방-전통 남화의 산실]

“내 집은 깊은 산중에 있어 매번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는 들에 깔리고 떨어진 꽃은 길바닥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없고 소나무 그림자는 길고 짧으며 새 소리는 오르내려 낮잠도 만족한다. 이윽고 샘물 길어와 솔가지 주어다 차를 다려 마신다. 생각나는 대로 주역, 국풍, 좌씨전, 이소, 태사공서와 도연명과 두자미의 시, 한유와 소식의 글 수 편을 읽고 조용히 산길 거닐며 소나무와 대나무를 어루만진다. 사슴과 송아지들과 함께 깊은 숲과 풀밭에서 뒹굴기도 하며 앉아서 시냇물 구경, 양치질에 발을 씻는다. 죽창(竹窓)으로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비나물을 만들어 보리밥을 지어주기에 흔쾌히 포식한 후 붓을 들다. 이어 크고 작은 글씨 수십 자를 쓰고 집에 간직한 법첩, 묵적, 서화 두루마리를 펴놓고 실컷 감상한다. 그리고 계산(溪山)으로 걸어나가 원옹(園翁) 계우(溪友)를 만나 상마(桑麻)를 묻고 벼[?]를 말하며 음청(陰晴)을 헤아리고 철서를 따지며 서로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운다.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섰노라니, 지는 해는 서산에 걸려 붉고 푸름이 만 가지로 변하며 소 타고 돌아오는 피리소리에 달은 앞 시내에 비치네(원문 생략).”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 아래 자리 잡은 운림산방(雲林山房)은 허련이 49세 때인 1866년에 건립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전통남화(傳統南畵)의 성지’로 지칭된다. 그 이름처럼 산천이 수려하며 운무가 깃드는 그윽하고 유현(幽玄)한 곳이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선면산수(扇面山水)"(지본담채(紙本淡彩) 20×60㎝)는 다름 아닌 그의 거처인 운림산방을 담은 그림으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선면에 꽉 찬 구도로 그린 그림으로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주산을 배경으로 중앙 하단에 조촐한 규모의 별서(別墅)가 등장된다. 산 위 여백에 거의 빈틈을 남기지 않고 빼곡하게 쓴 제(題)가 있다. 이 화가 자신의 글을 통해 소치의 유유자적한 삶의 편린을 전해준다.

진도군 쌍정리에서 허균(許均)[1569~1618]의 후손으로 태어난 허련(許鍊)[1808. 2. 7.~1893. 9. 6.]은 화가로 그야말로 다작(多作)한 인물이다. 86년에 이른 평생 적지 아니한 그림을 그린 지식인 화가였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그림의 수도 많으며 다작에서 기인된 탓에 태작(?作)도 없지 않으나 그림의 격조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오늘로 치면 지식을 지닌 교양인으로 전업작가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글인『몽연록(夢緣綠)』에서 밝히고 있듯 문화의 소외 지역에서 남다른 숱한 인연으로 임금과 거유(巨儒), 고관(高官), 다수의 여항문인(閭巷文人) 등과의 교유를 통해 그림 세계를 펼쳤다. 그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 업적으론 최근 김상협의 박사학위 논문을 들게 되며 이어 단행본『소치 허련』(소치연구회, 2002)으로 출간되었다.

아들 허형(許瀅)[1862~1938]이 부친의 초상을 남기고 있어 보통 체격에 눈은 작고 수염이 실한 외모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진도에서 태어나 28세 때인 1835년엔 조선에 있어 차[茶]의 성인인 초의(艸衣, 1786~1866)를 만났고, 해남 연동에 있는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고택 녹우당(綠雨堂)의 서화를 두루 열람해 안목을 넓혔다. 초의의 소개로 스승 추사를 만나게 되며, 32세 때인 1839년 김정희의 집인 장동에 위치한 월성위관에서 추사의 문하생으로 서화를 연마했다. 초의라는 호도 이 시기에 받은 것이다. 42세 때인 1849년 1월 중에 세 번, 5월에 두 번 창덕궁 낙선재에 입시(入侍)하여 헌종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스승의 평가에 걸맞게 산수, 인물, 기명(器皿), 사군자와 묵모란(墨牡丹) 등에 능해 다방면에 두루 뛰어나 적지 아니한 작품을 남기게 된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태작이 많아 평가에 부정적인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의 화풍은 가계를 이어 호남화단의 큰 물줄기를 이루어 오늘날에로 이어진다. 이 운림산방은 1981년 가을 지방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서허련은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1852~1931]을 낳았고, 허백련이 미산에게 그림을 배우는 등 화업(畵業)을 익혔으며, 화맥의 전승이 이루어졌다.

중국 장난[江南]의 부춘산(富春山)을 다녀온 이들 가운데 그림 특히 전통회화에 관심 있는 이들은 진도 풍광과의 유사성을 이따금씩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곳을 탐방하지 않았더라도 길고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에게 가까웠던 중국회화 가운데 삼대걸작의 하나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통해 그 대강을 엿보거나 짐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명화는 원말 사대가의 수장인 대치도인(大癡道人) 황공망(黃公望)[1269~1354]이 79세인 1347년 그린 간결하며 웅장한, 잘 알려진 그림이다.

부춘산은 황공망이 50세 무렵부터 은거해 나머지 반생을 도교적인 삶을 영위하며 그림에 전념한 장소이기도 한데, 허련은 그림뿐 아니라 삶의 여정마저도 대치와 닮고 있다. 주지되듯 소치(小癡)란 스승 추사가 대치(大癡) 황공망을 염두에 두고 지어준 호이이며, 운림산인(雲林散人) 예찬(倪瓚)[1301~1374]은 중국 남종화의 계보에서 점한 위치가 돈독하다. 아울러 조선에 있어 문인화의 수용에 있어, 그리고 특히 조선 말기 화단에서 추사를 비롯해 그를 따른 추사파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특히 허련은 호와 당호(堂號)가 시사하듯 양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남종화 내지 남종문인화란 단어는 오늘날 어떤 의미로 받아지는가. 이는 우리만이 아닌 동양문화의 종주국임을 자부한 중국마저도 근대화 과정에 있어 논의의 대상이었다. 전술했듯 20세기 전반까지 부정일변도로 전근대적 타도의 대상이었으나, 21세기로 가까워지며 변모된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은 국제적인 현상은 우리의 조선 말과 20세기로 이어지는 호남화단을 보는 시선도 바뀌게 되며 전통회화 가운데 남종화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남종화를 산수화에 있어 진경산수화의 대립개념으로 사의적(寫意的)인 관념산수(觀念山水)나 정형산수로, 중국의 한 아류로 보아 중국 그림을 생각 없이 단순히 베낀 그림으로 보니 이는 큰 잘못이다. 우리나라에 있어 불교와 유교를 비롯해 문화 전반이 그러하듯 진원지에서 진일보한 변화와 엄연한 차별을 보인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윤두서심사정(沈師正)[1707~1769], 강세황(姜世晃)[1713~1791] 등에 의해 우리 식으로 국풍화(國風化)된 남종화는 중국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조선의 미감(美感)이 창출한 그림 세계이다. 외견상 일견 비슷해 보이나 화면의 구도,구성,필치 등에서 엄연하게 구별된다. 우리들에겐 잘못 입력된 선입견에 의해 이에 대한 바른 인식이 가려져 있다. 이는 우리 산천을 소재로 하거나 우리 복식의 인물이 등장한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만이 우리 그림이며 한국화로 보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이에 학계 일각에서는 남종문인화 대신 선비그림이란 명칭으로 부르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 화단에서 조선식으로 국풍화를 보이고 나아가 조선말기 남종화가 주류를 이룸을 흔히 단순한 시대착오적인 보수적 성향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니, 이는 서양화의 유입과 궤를 같이 하면서 폄하를 파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근대화의 미명 아래 평가절하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조선 말기 제 현상을 동양의 전통회화 그 본질로의 회귀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에 추사를 보는 시선은 두 갈래이다. 그의 생애와 활동을 조명할 때 특히 그림에 있어서 복고성이 운위(云謂)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일선으로 새롭게 부각되는 중인계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성장시킨 점 등은 시대의 선구자로 오히려 혁신적, 근대적인 성향이 두드러짐을 천명치 않을 수 없다. 그가 이룩한 독보적인 추사체는 과거를 바탕으로 개진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새로운 세계이다.

추사는 조선 후기 화단(1700~1850)을 크게 풍미한 고유색 짙은 풍속화나 진경산수 등에 대해 앞선 시대의 18세기 예원의 총수였던 강세황과 달리 적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기량이나 격조 등 전 시대와 사뭇 구별되는 쇠퇴기의 말폐적(末廢的) 양상만이 잔존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허련은 19세기 화단에 있어 조희룡·전기 등과 더불어 추사파로 지칭된다. 그는 김정희를 계승하여 남종문인화에 전념해 직업화가 뺨치게 그림을 다작한 왕성한 화가였다. 자서전인『몽연록』을 통해 화업을 닦는 과정, 교우관계 등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추사에 방불한 서체나 유사한 화풍뿐 아니라 실제로 추사 앞에서 그림을 그려 이른바 예림갑을(藝林甲乙)에 포함되어 촌평을 받은 여덟 명의 화가 가운데 하나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탄생에는 무엇보다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자질, 예술적인 재질이 첫째이다. 끊임없는 부단한 매진과 함께 둘째는 명품, 즉 걸작과의 집요한 그리고 오랜 만남이다. 이는 일종의 안복(眼福)이기도 한데, 명품에의 감동은 또 다른 명품 탄생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서구 르네상스를 통해서 엿볼 수 있듯 명품에 내재된 살아 꿈틀대는 강한 생명력은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조선 초 거장 안견(安堅)[1390경~1470경]도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의 소장품인 중국 역대 명화에 힘입은 바 크다.

28세 때 해남 윤두서의 고택인 녹우당을 방문한 소치는 그곳에서 문중에 보관된 역대 명화뿐 아니라 간직된『고씨화보(顧氏畵譜)』등을 통해 남종문인화의 요체를 파악했다. 초의 선사의 소개로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익혔으며, 권돈인(權敦仁)[1783~1859], 신헌(申櫶)[1810~1888], 이하응 등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여러 소장가들이 애장한 중국 역대명화를 두루 열람하여 안목을 키우고 시계를 넓혔다. 이런 과정에 남종문인화에 속한 여러 중국 명가의 그림을 접했음은 물론이다. 41세 때에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이때 그린, 혼신을 기울인 화첩이 전해진다. 50세에는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을 세워 그림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자와 호는 그림의 소종래(所從來)와 그가 평생을 추구한 지향처를 알려준다.

다작으로 방대한 양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되나 반면 이에 따른 태작 또한 적지 않게 남아, 전해 격조 등 작품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쉼 없이 일관된 꾸준한 작품활동의 측면에서도 화가들 모두에 귀감이 된다. 화력 60년 동안 산수,산수인물,초상,사군자,묵모란,파초(芭蕉),연(蓮),송(松),화훼,괴석(怪石) 등 전통회화의 모든 분야를 그렸고 이 모두에 두루 능했다. 화풍상의 특징은 짙은 먹[濃墨] 위주에 마른 붓[乾筆]이 구사된 거친 필치, 다소 성근 화면 구성, 옅은 황색과 청색[담청담황(淡靑淡黃)]의 가채(加彩) 등이다. 소치에 대한 회화사적 의의와 평가는 남종화풍의 토착화와 이를 통한 호남 화단의 형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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