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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치마을-특성-마을의 발전과 문화재의 역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005T08040
한자 智山面 禿峙마을-特性-마을의 發展과 文化財의 役割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문화마을
인구(남) 198명
인구(여) 211명
가구수 181가구

[마을의 발전과 문화재의 역할]

무형문화재가 인지마을의 경제적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대답하기 곤란하다. 다만 문화적인 영향면에서 본다면, 진도의 민속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과, 많은 명인들을 배출한 마을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지마을의 문화적 위상을 무형문화재가 높였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지리에 있는 지산면 민속놀이 전수관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본래 전수관의 출발은 조공례에 의해서였다. 남도들노래뿐만 아니라, 진도만가의 메김소리를 도맡아서 연행하던 조공례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전승을 돕기 위해 마련된 것이 이 전수관이기 때문이다. 조공례의 자택 윗뜰에 터를 마련하였으며 1999년 12월에 그 문을 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남도들노래와 진도만가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전수활동을 하거나 강습활동을 하기도 한다. 현재 남도들노래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순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고, 남도들노래 인간문화재인 이영자, 박동매를 비롯해 조교인 박재준, 박종단, 그리고 만가 인간문화재인 김항규, 설재림 등이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의 역할은 곧 해당 인물들의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지마을이 진도의 민속문화를 대표하는 마을이 된 것은 이 마을 태생이거나 밖으로부터 이주해 온 인물들의 역할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요 인물 중에서 이 마을 태생으로는 박병천을 비롯하여 설재천, 김항규, 설재림, 신영희, 김영자, 박동매 등을 들 수 있고, 혼인이나 이주로 인해 인지마을에 정착한 이들로는 조공례를 비롯해 신치선, 정숙자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다. 지정무형문화재에 국한하여 본다면 박종단을 비롯해 박광순 등의 후진들도 거론할 있다. 특히 김길선은 인근 마을인 삼당리 출신이지만, 남도들노래 보존회 초창기부터 못북으로 출발하여 진도북놀이 인간문화재가 된 인물이기 때문에 포함하여 거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로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박병천이다. 박병천은 1933년 인지리에서 박범준과 김소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목포상선고교를 졸업하고, 진도고등학교 농악강사, 국악협회 진도지부장, 진도국악원장,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8세 때부터 판소리의 명인 박동준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30세 때에는 살풀이의 명인 이매방에게 무용을 배웠다. 진도들노래(남도들노래)와 강강술래를 지도하거나 진도만가 등 대부분의 진도민속연희에 연출가나 안무가로 참여하였다.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진도만가 설소리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80년 11월 17일 진도씻김굿이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가 되었고, 서울의집[코리아하우스] 악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진도씻김굿의 가락, 소리, 춤 뿐만이 아니라 진도북춤의 명인으로도 널리 이름을 날렸다. 특히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객원교수로 임용되고 영암의 대불대학 내에 국악학과를 설립하여 석좌교수로 활동하였다. 이외에 해외공연을 주도하는 등 진도민속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둘째, 박병천의 배우자인 정숙자이다. 1039년 충청도에서 태어나 1991년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학력은 중졸로 알려져 있다. 그의 나이 23세에 박병천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본래 유랑극단의 단원으로 진도에 들어와 박병천을 만나게 되었다. 시어머니 김소심과 고모 박선내로부터 무업을 승계 받았다. 주요 기능으로는 씻김굿, 성주굿, 재수굿, 혼건지기굿 등이 있다. 특히 제석굿 중의 축원과 덕담소리를 잘했고 살풀이춤을 잘 췄다. 앞서도 거론하였듯이, 씻김굿에서 파생된 지전살풀이춤을 비롯해, 진도만가의 질베행렬의 재창조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만큼 인지리뿐만이 아니라 진도민속문화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남도들노래 인간문화재였던 조공례를 들 수 있다. 조공례는 1925년 지산면 갈두에서 태어나 1997년 노환으로 타계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51호 남도들노래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였다. 어려운 혼인생활을 거치면서, 지산면 길은리[용동리], 목포시, 해남읍, 인지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름난 소리꾼이었던 아버지 조정오 옹에게 사사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가창력이 좋아 강강술래 등의 놀이판에 선소리꾼으로 활약하였다. 1971년 전주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남도들노래)로 전북지사상을 수상했다. 1973년 (남도들노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였다. 주요 장기로는 남도민요 중에서도 특히 진도의 토속 소리를 잘했다. 막내딸인 박동매(朴東梅), 이후 (조공례의 후임으로 예능보유자가 됨)외에 다수의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남도들노래, 강강술래, 진도만가(상여소리) 등을 비롯한 몇 편의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많은 학자와 동호인들이 조공례의 노래를 배워가거나 감상했는데, 그 중 시인 곽재구는 조공례를 이렇게 묘사했다.

진도 지산면 인지리 사는 조공례 할머니는/ 소리에 미쳐 젊은 날 남편 수발 서운케 했더니만/ 어느 날은 영영 소리를 못하게 하겠노라/ 큰 돌멩이 두 개로 윗 입술을 남편 손수 짓찢어 놓았는디/ 그날 흘린 피가 꼭 매화 꽃잎처럼 송이송이 서럽고 고왔는디/ 정이월 어느 날 눈 속에 핀 조선 매화 한 그루/ 할머니 곁으로 살살 걸어와 입술의 굳은 딱지를 떼어주며/ 조선 매화 향기처럼 아름다운 조선소리 한 번 해보시오 했다더라./ 장롱 속에 숨겨둔 두 개의 돌멩이를 찾아와/ 이 돌 속에 스민 조선의 핏방울을 꼭 터뜨리시오 했다더라.

넷째, 신치선을 들 수 있다. 신치선은 1899년 담양에서 태어나 1959년 목포에서 타계하였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金正文)[宋萬甲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사사받았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나이 40에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申英姬)[판소리 명창] 등 1남 1녀를 두었고,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1남을 더 두었고, 판소리 강습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安得潤), 박연수(朴連洙), 박옥수(朴玉洙),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에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하였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安得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행년(신영희와 더불어 대명창이 됨)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가 하면,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순회공연 및 만주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하였다.

다섯째, 신치선의 장녀인 신영희를 들 수 있다. 신영희는 1942년 지산면 인지리에서 태어나 현재 판소리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뒤에 안기선, 장월중선,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목포국악원에서는 당시 국창급 명창이던 안행련과 동문수학했으며, 여명창 3걸로 불리기도 했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었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종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경력을 보면,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한 점, 특히 KBS코미디 쇼비디오자키- 쓰리랑부부(도창역)로 장기 출연하여 진도의 소리를 널리 알린 점들이 돋보인다. 상훈으로는, 1963년 민속예술제 최우수상(창악부), 1977년 남원춘향제1위(명창부문), 1997년 제11회 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국악부문), 2005년 화관문화훈장, 2005년 제7회 한국예술 실연자대상(국악부문) 등이 있다. 공연으로는 1987년 문예회관 대극장의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비롯해 다수의 공연 및 발표회를 한 바 있다. 2002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소리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현재 후학들을 양성해내는데 전력을 쏟고 있다.

여섯 번째로는 설재천을 들 수 있다. 설재천은 1906년 지산면 인지리에서 출생하여 1987년 인지리에서 타계하였다. 남도들노래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조공례와 같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설재천은 남도들노래뿐 아니라 특히 사당패가 전해준 다양한 노래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어서 후대에 이 노래를 전승한 공로가 인정되고 있다. 전수된 사당패의 노래 중에서는 꽃방아 타령 등이 거론된다.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로 활동하면서 마을의 민속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일곱 번째로 김항규를 들 수 있다. 김항규는 1925년 지산면 인지리에서 출생하여 줄곧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원래 농악이나 풍물에서 징을 잘 쳐서 징수로 이름이 났다. 1987년 8월 25일 진도만가가가 전남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생업을 하면서 진도만가의 전승과 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김항규의 부인인 조씨는 사실 들노래 인간문화재였던 조공례와 친형제간이다. 따라서 조공례가 인지마을에 정착하게 된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여덟 번째로 설재림을 들 수 있다. 설재림은 1944년 인지리에서 태어나서 줄곧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진도만가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94년 12월 5일 전남 도지정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아홉 번째로 이영자를 들 수 있다. 남도들노래보존회가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결성될 초기부터 관여하였고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전수장학생 활동을 하였다. 예능보유자 조공례가 타계 한 이후, 2001년 11월 30일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남도들노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남도들노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에 전승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평가되는 박팽년이 있다. 그러나 들노래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내놓은 상태에서 타계하는 바람에 큰 빛을 보지 못한 인물이다. 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단연 인간문화재감이었다고 입을 모으는 인물에 속한다. 또 남도들노래 조교로 활동하고 있는 박종단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다. 본래 조공례로부터 노래를 배웠고, 박동매로부터 판소리도 수학 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시래기 조교로 활동중인 박광순은 본래 지산면 고길리 사람이다. 인지리로 이주해오면서 다시래기 보존회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현재 다시래기 ‘거사’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산면 삼당리의 김길선을 빼놓을 수 없다. 인지리 사람은 아니지만 남도들노래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인물이고 또 들노래의 못북에서 출발하여 북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길선은 1938년 내삼당리에서 출생하였다. 청년시절부터 북춤을 잘 춘다는 말을 들었으며 못북과 마당밟이의 북을 도맡았다고 말한다. 특히 못북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남도들노래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에 들노래 못북으로 활약한 셈이 된다. 이후 임회면 석교리[십일시리]의 장성천 문하로 들어가 진도북놀이 계보를 갖췄으며 장성천 예능보유자 타계 후, 1997년 6월 24일 진도북놀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한편, 소포만을 통하여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 시절에는 내삼당 나루터가 인지리와의 가교 역할을 하였을 것이므로 인지리와 지리적으로도 그 맥락이 닿아 있는 셈이다. 현재는 지병으로 활동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꾸준히 전승에 노력하고 있는 편이다.

이상의 인물 중에서 지산면 인지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이는 박병천과 조공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인물은 민속문화와 관련하여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을 떨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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