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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622
한자 裵仲孫
영어음역 Bae Jungs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병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장군
출신지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또는 강화도 길상면 출신으로 구전됨
성별
몰년 1271년연표보기
대표관직 삼별초 지휘관

[정의]

고려후기 삼별초를 이끌었던 장군.

[개설]

배중손이 역사에 뚜렷이 부각되는 것은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경력은 자세하지 않다. 왕정복고파와는 달리 대몽항전의 지속을 주장하였던 임연(林衍) 부자 계열에 속하는 무인으로, 임연 부자의 몰락 후에 대몽 강경파의 선봉에 서서 비타협적 항전을 계속한 인물이다. 배중손은 서반의 장군인 동시에 가장 유력한 삼별초의 지휘관이었던 까닭에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령으로 추대되었다.

[생애]

배중손의 출생에 대해서는 진도에서는 임회(현재 남도포가 있는 면) 출신인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반면 강화도에서는 배중손이 강화도 길상면 출신인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배중손은 1271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진도 남도진성 전투 때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사항]

1270년(원종 l1)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가 단행된 후 고려 조정은 항몽세력의 거점을 없애기 위해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兵籍)을 몰수하였다. 배중손삼별초의 지휘관으로서 야별초의 지휘관 노영희(盧永禧)와 공모하여 반란을 주도하였다.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였다.

배중손은 본토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귀족·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섬 주민들과 병사의 이탈을 엄중히 금지하였다. 또한 도내에 있는 몽고인을 베어 단호한 대몽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강화도에 보관된 국고를 접수하고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배중손은 새 정부 수립 3일 후에 진도로 본거지를 옮겼다.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옮겨간 뒤 강화도 인심이 흉흉하고 이탈자가 속출하자, 함선 l,000여 척을 징발하여 국고와 백성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행하여 진도에 도착하였다.

진도에서 궁궐을 세운 후 남해 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하여 관군을 격파하여 위세를 떨쳤다.『고려사』에는 수비병의 탈주와 민심의 동요로 인해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한 것처럼 전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이른바 심입해도(深入海島)는 역대 대몽항쟁에서 최고·최후의 전략으로 배중손이 이를 실천했을 뿐이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도내에 방비의 성곽을 구축하고 장기 항전의 태세를 굳혔다.

이 소식이 본토에 전해지자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멀리 개경의 관노들이 동조하였다. 삼별초는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노획해 재정에 충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 토적사(全羅道 討賊使)에 임명해 토벌하게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단독으로 삼별초를 진압할 능력이 없었던 고려 조정은 몽고군과 연합해 공략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여몽연합군을 결성할 때 고려군의 지휘관은 김방경(金方慶)이었으며 몽고군의 지휘관은 처음에는 아해(阿海)였으나 뒤에는 흔도(忻都)로 바뀌었다. 흔도는 몽고 세조(世祖)의 조서를 배중손에게 전달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배중손은 몽고군이 철수하면 전라도를 자기의 영토로 삼아 몽고에 내부(內附)하겠다고 하였다. 배중손의 이 제안을 앞서 자비령 이북 서북면 60여 성을 들어 몽고에 항복한 최탄(崔坦)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작전상의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몽연합군이 진도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한 후,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홍다구의 대군은 김방경·흔도의 휘하에 있던 연합군과 합세해 격전 끝에 진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삼별초가 추대한 군왕인 승화후 왕온홍다구에게 죽었고, 배중손도 전사한 듯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진도 함락 이후에도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을 지휘관으로 삼아 2년간 항전을 계속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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