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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664
한자 佛敎
영어음역 Bulgyo
영어의미역 Buddhism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정명철

[정의]

석가모니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

[개설]

진도의 불교는 오래 전부터 이 지역민들의 신앙이 되어왔으나 오래된 사찰은 대부분 폐찰되었다. 해방 이전에 건립된 사찰로는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에 있는 쌍계사(雙溪寺)가 유일하고, 그 외에는 폐사지에 남아 있는 유구(遺構)와 암벽에 조각된 불상을 통해서 흔적만이 확인되고 있다.

[사찰과 유물]

1.쌍계사

쌍계사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尖察山) 서쪽의 평지에 있는 사찰이며 현재는 대흥사 말사이다. 『범우고(梵宇攷)』, 『여지도서(輿地圖書)』, 『옥주지(沃州誌)』 등의 사서에는 쌍계사가 진도 유일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진도 불우조」에 죽림사(竹林寺), 봉성암(鳳城庵), 사나사(舍那寺) 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조선 말기의 「지리지류(地理誌類)」에는 모두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다. 쌍계사는 1648년(인조 26년)에 석의웅(釋義雄)이 창건하였으며, 시왕전(十王殿)도 이때에 차례로 건립되었다. 시왕전은 1694년(숙종 20년))에 훼손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1695년(숙종 21년)에 중건되었다. 대웅전은 강희 36년 정축년, 즉 1697년(숙종 23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측면 3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양식이다. 현재 대웅전 내에 안치된 동종은 1720년(숙종 46년)에 쌍계사에서 주조된 것이다. 또한 시왕전이 1767년(영조 43년)에 중건(3창)되었다.

시왕전 중창으로부터 42년이 지난 1808년(순조 8년)에는 비바람으로 시왕전이 낡아져 전복되고 만다. 보림사에서 머리를 깍은 승려인 비구 경(敬)은 이것을 슬프게 여겨 진도에 살면서 쌍계사 정전을 중수하였다. 그는 단월가(檀越家)를 돌아다니면서 재물을 얻어 시왕전을 새롭게 고치고,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안치하였다. 시왕상은 백성들로 하여금 악업을 짓지 못하게 만들고, 선업에 귀의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웠다. 또한 시왕에게 경건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재앙을 물리쳐주고 복을 준다는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시왕전이 중수된 것으로 여겨진다.

「쌍계사 시왕전중수기(雙溪寺 十王殿重修記)」(1808)는 갑도(甲島)에 귀향 온 호은노인(壺隱老人)에게 비구 정어(正語)가 청하여 중수전말을 기록케 하였다. 「쌍계사 시왕전중수기」는 향동 박인효(朴仁孝)가 지었으며 각수(刻手)는 비구 도인(道仁)이 맡았다.

1863년(철종 14년)에는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三尊佛]을 개금하였으며 이 무렵에 쌍계사의 중수가 또 한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초의(草衣) 의순(意恂)[1786~1866]의 「진도 쌍계사 대웅전불상개금소(珍島 雙溪寺 大雄殿佛像改金疏)」(1863)와 그의 제자 범해(梵海) 각안(覺岸)[1820~1896]이 쓴 「옥주쌍계사중수기(沃州雙溪寺重修記)」의 불사기록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1868년(고종 5년) 8월에는 처사 이침산(李枕山)이 쌍계사에 들어왔는데, 범해 각안이 이침산을 가리켜 ‘유마거사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주목이 된다. 범해 각안이 지은 『동사열전』은 198명의 치적을 적은 책이었는데, 그 가운데 196명이 승려였고 나머지 두 명은 속인이었다. 이 두 명은 김대성(金大城)과 이침산(李枕山)으로 범해 각안은 대단히 비중 있는 불교인으로 이침산을 서술하고 있다.

1928년에는 대흥사의 용허선사가 군수 남정학(南廷學)의 도움으로 쌍계사를 크게 중수하였다고 하며, 현재는 대웅전, 시왕전,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2. 해원사지(海院寺址)

해원사지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94-1번지 일대로 현재의 금성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오층석탑(보물 529호) 부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3년 학교 주변을 정리했을 때 많은 석재와 초석·와편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해원사지는 해언사(海堰寺)·해안사(海岸寺)·해월사(海月寺) 등으로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주(李胄)의 『금골산록(金骨山錄)』에는 해원사(海院寺)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하다. 『금골산록』은 1498년(연산군 4년)에 진도로 유배 왔던 이주가 쓴 것으로, 『속동문선(續東文選)』에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금골산진도읍에서 서쪽으로 20리 지점에 있는데, 이 산 아래에 해원사가 있고 9층석탑이 있다. 산 위에 삼굴이 있는데 맨 밑의 서굴은 창건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일행(一行)이란 스님이 향나무로 16나한을 조성하여 굴에 안치하고, 굴의 곁에 별도로 고찰 6~7칸 있어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다. 또한 동굴의 주사(廚舍)는 모두 비바람에 퇴락되었으나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1469~1472, 진도군수 재임]가 만들었다.”

이와 같은 해원사의 기록은 『금골산록』에만 있고, 당시 고기(古記)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원사는 이때까지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금골산록』이 기록된 후인 16세기 이후에 폐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골산록』에 미륵불로 기록되어 있는 금골산 마애여래좌상(金骨山 磨崖如來坐像)은 해발 200여 m의 금골산 정상 암벽에 새겨져 있다. 암벽의 높이는 약 10m이고 가로 너비는 22m쯤 된다. 여기에 감실을 파고(약 5~7m 안으로 굴을 팜) 그 안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는데 전체 높이는 3.8m이다. 머리에 두광을 새긴 이 불은 좌상으로서 비교적 조각기법이 세련됐다.

소발을 한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둥글넓적한 얼굴에 눈·코·입·귀 등을 표현하였는데, 입은 일자형이고 눈은 지그시 감은 듯 명상에 잠겨 있다. 또 코는 넓적하고 상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 마애불의 전체적인 기법이 졸렬하게 보인다. 목은 아주 짧으며 삼도가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특이한 것은 오른편 어깨에 조식한 의문이다. 두 가닥이 겹쳐서 밑으로 내려오다가 오른팔에 걸친 의문과 연결되고 있다. 역시 왼쪽 팔에서도 의문이 있는데 균형미를 잃어 조잡한 감이 있다. 무릎은 오른발이 밖으로 나오고 왼발이 안으로 들어가는 길상좌를 하였으며 군의자락이 무릎을 덮어 그 끝이 무릎 밑으로 겹쳐져 있다. 수인은 아미타수인 가운데 중품하생인을 결하고 있다. 두광은 두정을 중심으로 두 줄의 음각 원대를 둘렀을 뿐 다른 조식은 보이지 않는다. 가슴 중앙에 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는데 처음 조성할 때 간단한 복장물을 넣으려고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높이 304㎝, 상호 높이 88㎝, 무릎 너비 285㎝, 무릎 높이 76㎝이다.

3. 죽림사지(竹林寺址)

죽림사지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마을 뒤 북서쪽으로 500m 지점의 여귀산(女貴山) 동쪽 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터에서 죽림사라고 단정할 만한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구전과 죽림(竹林)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보아 이곳의 절터를 죽림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죽림사는 고려시대 때 창건했다고 전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절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지만 연혁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에 불에 탔다고 하며, 1656년경에 간행된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기록되어 있으나 1780년대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 “죽림사금폐(竹林寺今廢)”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범우고』 간행 이전에 죽림사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에는 3단으로 된 석축이 남아 있다. 3~5m 높이의 석축이 양쪽으로 30m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가운데는 김해김씨의 묘 2기가 있다. 석축은 1m 크기 가량의 정사각형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주변에 자기편과 많은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석축 위쪽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절터의 전체 넓이는 남북 40m, 동서 30m의 크기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4. 영흥사지(永興寺址)

진도군 임회면 죽림사지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지점에 영흥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영흥사는 1930년경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절터 앞에 1962년에 세운 영흥사창건주김남옥대선사비(永興寺創建主金南玉大禪師碑: 높이 90㎝, 너비 30㎝)만 남아 있다. 비의 뒷면에는 시주자의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절터는 높이 1.2~1.5m의 석축 위에 동서 25m, 남북 15m의 평지가 있다. 이곳이 절터였다면 작은 암자였을 것이다.

5. 용장사지(龍藏寺址)

용장사지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52번지에 위치하며 현재 사찰이 복원되어 있다. 용장사가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전기 고왕(高王) 때라 전하는데, 『진도군지』에서는 고왕을 고려 태조 때의 후진국(後晋國) 고왕[936~943]이라고 여기고 있어, 고려 전기에 창건된 절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용장사라는 지칭은 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최우(崔瑀)의 서자인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이 무뢰배를 승려로 만들어 고리대금업을 시작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중략) 만전이 일찍이 진도의 한 절[珍島一寺]에서 통지(通知)란 부하와 함께 심한 횡포를 부렸는데 안찰사 김지대(金之垈)가 그 절에 이르자 만전이 여러 가지 청탁을 했다.” 여기서 진도의 한 절이란 구절이 보이는데, 이 구절을 통해 이곳을 용장사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옥주지』에 나온 고왕(高王)은 고려 고종(高宗)[1213~1259] 대를 가리킨 것으로 풀이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1985년에 나온 「진도용장성지표조사보고서(珍島龍藏城地表調査報告書)」에 따르면 용장성지는 258만 평에 달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조사된 건물지 유구 가운데 초석의 형식 등으로 보아 삼별초군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법당은 최근에 지은 것이며, 진도 용장성에서 동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삼존석불이 있으며, 일명 용정사(龍井寺)라 부르고 있다.

6. 한사리사지(寒寺里寺址)

한사리사지진도군 군내면 한사리 190번지, 즉 한사리 마을 뒤 북쪽의 마령산 아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산사(寒山寺)’ 또는 ‘한사’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기록에는 없다. 이곳에서는 삼층석탑으로 보이는 석재, 삼각형의 판석에 양각한 불상, 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주민들도 이곳을 ‘절고랑창’, 또는 ‘절골’이라 부르고 있다.

한사리사지 석불좌상은 이 마을에 사는 정순홍 씨의 밭에서 발견되었는데, 원추형의 판석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전체 높이 177㎝, 좌상 높이 152㎝이며, 무릎 너비는 122㎝이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가 높게 솟아 있고 상호는 둥근 원만상이나 턱이 좁아지는 형이다. 눈은 지그시 감은 듯하나 마모가 심한 상태이며 코는 길게 내려오다 하단에서 퍼지는 벌렁코를 하고 있다. 입은 위아래 입술이 튀어나와 전체적인 균형을 잃고 있다. 귀는 형식적으로 작게 처리하였다.

목에 삼도가 희미하게 보이며 법의는 통견이나 의문이 선명치 않아 형태를 파악할 수 없다. 수인의 경우 오른손은 무릎에 내린 항마촉지인인 듯하나 어색하고 왼손은 팔을 구부려 무릎 위에 놓았으나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릎은 상체에 비해 너무 넓게 벌려 상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7. 상만리사지(上萬里寺址)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는 있는 이 절터의 절은 상만사(上萬寺)였다고 구전되고 있으나 전하는 기록은 없다. 절 이름은 한동안 만흥사(萬興寺)였다가 지금은 구암사(鳩岩寺)가 되었으며, 태고종에 등록되어 있다.

구암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은 높이 102㎝, 광배 너비 98㎝, 광배 두께 11㎝인데 광배 일부가 파손되고 마모가 심하여 불상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는 넓고 높게 솟아있다. 상호는 눈, 입, 코 등이 양각되었으나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귀는 길게 내려뜨렸고 목에 삼도가 희미하게 음각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양팔과 앞가슴에 음각으로 된 의문이 표시되어 있으나 지극히 형식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앞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손바닥을 편 채 대고 있어서 아미타구품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무릎은 형태만 갖추었을 뿐이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8. 향동리마애불(香洞里磨崖佛)

진도군 고군면 향동리에서 남쪽으로 약 1.5㎞ 내려가면 해발 291m인 가련봉이 나타난다. 향동리 마애불은 가련봉 정상 바로 밑의 암벽에 조각된 것인데, 약 3m 높이에 정동남향을 하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약 2.5m로 큰 편이며, 불상이 조각된 암석의 질이 좋지 않아 불상의 형태를 거의 파악할 수 없다.

전체 모습은 좌상으로 보이며 얼굴은 형상만 갖추었을 뿐 자세한 윤곽이 나타나지 않는다. 수인은 오른손을 앞가슴에 대고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며 왼손은 전혀 형태를 알 수 없다. 무릎은 결가부좌를 한 듯하나 윤곽만 드러날 뿐 의문이나 무릎의 형태 등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범바위’라 일컫고 있으며 암벽의 전체 높이는 약 25m쯤 된다.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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