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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713
한자 三別抄의 亂
영어음역 Sambyeolchoui Nan
영어의미역 Sambyeolcho (Three Elite Patrol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병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대몽(對蒙) 반란사건|대몽 항전
발생(시작)연도/일시 1270년(고려 원종 11)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73년(고려 원종 14)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강화도
관련인물/단체 삼별초|배중손

[정의]

고려 무신정권기에 특수부대였던 삼별초가 몽고의 간섭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역사적 배경]

무인정권(武人政權) 말기 최우가 집권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그 뒤 인원이 늘고 기구가 확대되어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져 편성되었다.

이후에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이 새로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리하여 좌별초·우별초와 신의군이 합쳐서 삼별초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몽고와의 전쟁이 일어난 뒤 얼마 안 된 시기였다.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국가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는 등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권신의 정치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癒着)되어 있어 사병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삼별초의 난의 기본적 요인은 우선 삼별초라는 강력한 전투병력이 권신들과 깊은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정치적 특수상황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뒤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 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이러한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으며, 10여 년간의 고려의 내부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삼별초를 비롯한 무인들은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決戰)을 사양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왕실은 몽고에 접근,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반면 몽고는 배후에서 왕실을 조종해 반몽고세력을 배제하려고 획책하였다. 결국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확정하자 삼별초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삼별초의 성격과 경력으로 보아, 세력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철수해 개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경은 몽고군에 호위된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몽고의 대군(大軍)도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환도는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특히,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보복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강화도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몽고병과 싸워 적개심에 불타는 그들은 개경환도를 계기로 고려가 몽고에 종속화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민간의 동향에 힘입어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고·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운동으로 제고(提高)하였다.

[발단]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한 이후, 당시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던 원종삼별초의 동태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삼별초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원종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강압적으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어갈 것으로 판단하여 1270년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를 태워 진도로 보냈다. 이때 선박 1,000여 척이 동원되었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몽고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진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였다. 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진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이때 나주에 와 있던 전라도토적사참지정사(全羅道討賊使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과 전주부사 이빈(李彬)이 삼별초의 위세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쳐왔다. 전주·나주와 같은 내륙의 큰 도시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을 대신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했고,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도 동행하였다. 고려·몽고 연합군의 진격으로 형세는 약간 정부군에 유리하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전라도 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합포(合浦)[지금의 경상남도 마산]·동래·김주(金州)[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삼별초는 탐라(耽羅)[제주도]를 공략,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여러 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김방경·흔도(忻都)·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 겨우 성공하였다.

이때 승화후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 여 명이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고관의 가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별초는 파멸 직전의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여당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해 우선 방어진지의 구축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해 자주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해 11월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와 그 처를 납치했고,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남도의 세공(稅貢)을 해상에서 약탈해 조운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결과]

삼별초는 최후까지 분투했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원나라 세조(世祖)는 일본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해 1272년 8월 사신을 보내 탐라 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이에 홍다구김통정에게 선무 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인(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 한군 2,000명)이었다. 4월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죽고, 여당 1,3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의 공격에도 3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삼별초가 매우 우수한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배후에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와 몽고군에 대해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 고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청도군(淸道郡)의 농민들은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관헌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삼별초에 동조해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정부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당시 반정부·반몽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반란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의 폭동이었다. 이것이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3년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의 항쟁기간에 정부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능력은 없었다. 그리하여 항상 몽고군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육지에 있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억압을 가하였다. 이것은 이미 왕실 중심의 고려왕조가 완전히 민심에서 이탈되어 몽고의 종속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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