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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919
한자 失鄕民村
영어음역 silhyangminchon
영어의미역 Silhyangmin Village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진도군 군내면 안농리|의신면 진설리|의신면 신생리
집성촌 진도군 군내면 안농리
입향시기/연도 1951년연표보기

[정의]

휴전선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지역.

[개설]

한국전쟁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황해도 장연, 송화, 옹진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생긴 집단 거주지역이다. 2005년 현재 진도에는 실향민 350가구가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실향민회(회장 전송권)가 있다.

[연원]

한국전쟁이 일어나 낙동강변까지 밀렸던 한국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 유엔군은 황해도 장연(長淵), 송화(松禾)와 옹진 사람들을 목포에 철수시켰으며, 진도에도 700여 가구가 배당되었다.

[입향 경위]

1951년 12월에 해창을 경유해 진도초등학교진도중학교 및 농업학교 교정에 천막을 치고 실향민을 임시로 수용했으나 1952년에 진도군 의신면 칠전 가는 길목 1㎞ 지점과 왕무덤재 밑에 간이 피난민 수용소를 건설하고 이들을 수용했다. 칠전 옆 수용소는 오늘날의 신생리(新生里)이며 왕무덤재 밑 수용소는 진설리(陳設里)이다. 당시의 생활상을 보면, 당국의 구호와 저수지 공사장 인부, 땔 나무 장사, 엿 장사, 밀주, 소주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장터를 돌면서 주로 여자들이 되걸이로 살아갔다. 이에 따라 진도에 여자 장돌배기가 유행처럼 퍼졌다.

[집성촌 현황]

송화 출신을 중심으로 한 110가구는 둔전 간척지 사업을 위해 금골 곁에 새로 지은 안농(安農)이라는 수용소로 이주하였다. 1958년 간척사업이 끝나고 900평짜리 2단지(1,800평)씩을 분양받았다. 이곳이 오늘날의 군내면 안농리로 42가구가 살고 있다.

진설리에는 현재 9가구가 살고 있으며 신생리에는 황해도 해주 출신 윤옥균 1명만 남아 있다. 신생리에는 장연 출신 이운택이 고아원을 개설해 30여 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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