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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106
한자 流配文化
영어음역 yubae munhwa
영어의미역 tradition of exi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김동수

[정의]

어떤 지역에 유배된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형성된 중앙문화와 비교되는 지역문화.

[개설]

유배문화란 어느 지역에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유배생활 중에 지역주민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훈육하면서 중앙의 수준 높은 문물을 전해주어 발전된 지역문화를 말한다. 반대로 유배인 스스로가 유배지역의 토착문화나 민속, 예술 등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학문이나 경륜, 예술적 자질들을 발전시킨 측면도 유배문화에 포함된다.

[전국의 유배지 분포]

조선시대 유배지를 도별로 분류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표 1)에서와 같이 우리나라 여덟 개 도 중에 전라도 지역이 유배가 가장 많았던 지역으로 나타난다. 전라도 지역을 다시 세분해 보면 진도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흑산도, 고금도, 강진, 장흥, 지도 등의 순이다. 이 연구의 결과를 전적으로 따르기는 어렵지만, 전라도 지역, 그리고 진도지역에 유배가 많았던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진도가 이처럼 유배지로 널리 이용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면서도 크고 비옥한 지방이라는 조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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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조선시대 도별 유배인수

[진도 유배의 역사적 배경]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된 사람의 수를 정확하게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배인들은 6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반 수 가까이는 3년 미만의 적거생활을 하였고, 10여 명은 4~10년간, 그리고 가장 오랜 유배기간은 19년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진도의 문화에 크게 영향을 주고받았던 유배인들은 4~20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인물들이다. 유배인들이 진도로 유배된 사유는 대체로 정치범·사상범의 범주에 속한다. 곧 정변이나 왕위교체, 사화나 당쟁에 연루되거나 행정적 과실에 대한 처벌, 한말의 의병이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경우 등이다.

진도지역에서의 배소(配所)로는 금갑도(金甲島)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이외 금호도(金湖島), 임회면 피동, 의신면 칠전리 등도 이용되었다.

[진도에 영향을 미친 유배인들]

진도 유배인 중 진도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과 사례로는 19년간을 적거하면서 교육과 저술에 힘쓴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1515~1580], 5년을 적거한 김이익(金履翼)[1743~1830], 12년을 적거하면서 진도의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무정(茂亭) 정만조(鄭萬祚)[1858~1936]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노수신, 정홍익(鄭弘翼)[1571~1626], 남이성(南二星)[1625~1683], 이경여(李敬輿)[1585~1657], 이민적(李敏迪)[1625~1673], 김수항(金壽恒)[1629~1689], 조태채(趙泰采)[1660~1722] 등은 진도민의 교화에 공이 큰 인물들이라 하여 봉암서원(鳳岩書院)[1602년 건립]에 제향되었다.

[유배인들의 작품]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된 사람들은 진도의 풍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전해지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되어 온 이주(李冑)[?~1504]의 「금골산록(金骨山錄)」, 노수신이 쓴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 그리고 정만조「은파유필(恩波濡筆)」이 있다. 또한 진도 유배 중에 많은 저술을 남긴 사례로는 노수신의 「서연강의수정(書筵講義修正)」,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김이익의 「금강영언록(金剛永言錄)」, 「금강중용도가(金剛中庸圖歌)」, 「순칭록(循稱錄)」 등이다.

[의의 및 평가]

진도는 해도이면서도 물산이 풍부한 지리적 조건으로 가장 널리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진도 유배자들은 진도민들과 교류하면서 지식을 전달하고 교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고 또 자신의 경륜과 사상을 가다듬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진도의 풍부하고도 독특한 문화의 발전에는 이처럼 유배인들과의 교류가 일정 정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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