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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1211
한자 壬辰倭亂
영어음역 Imjin Waeran
영어의미역 Japanese Invasion of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왜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98년 11월 19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도 부산성
관련인물/단체 선조|이순신|도요토미 히데요시

[정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조선 중기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난 뒤 남해안 지방에서 왜변이 빈발해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군국기무(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備邊司)라는 합좌기관(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선조 때의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 질시만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명(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한편 이이(李珥)는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 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당파싸움과 정치기강의 해이, 전세제(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이러는 동안 1553년(명종 8)에는 진도에도 왜적이 침입해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해 7월 9일에 전라도 우수사 김경석(金景錫)이 아뢰기를 “진도군의 초도(草島) 외면에 왜노 7~8명이 상륙하였으므로 초순군(哨巡軍)이 추격하여 싸워서 한 명을 베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이다. 이 무렵에는 흑산도에서 왜인을 사로잡고 참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진도군수 김세명(金世鳴)의 보고 등 진도 주변에서의 왜인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처럼 남쪽에서는 왜인이 준동하고 북쪽에서는 야인들이 심상치 않은 동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당쟁이 심화되는 동안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봉건적 지배권을 강화시켜가면서 대륙침략의 야망을 품고 마침내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르니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경과]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경상도 가덕도(加德島) 응봉봉수대(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 수 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도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의의 침공을 받은 조선은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못한 채 불과 20여일 만에 서울을 함락당하고 국왕은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난길에 오르는 처지가 되었다.

육지에서의 전황이 이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이 적의 함대를 연전 연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적의 해상보급로가 차단당하게 되어 왜군은 작전 수행계획에 심대한 차질을 보게 되었다. 아울러 점차 국난 타개의 전환점을 다져가는 형세가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진도지역의 피해상황은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호남절의록』을 보면 초기에 왜군이 벽파진 앞 바다에 나타나 이대익(李大益), 정세신(鄭世臣) 등이 의병을 모아 방어에 임했으나 마침내 진도성이 함락되었고, 이대익도 전사당하고 말았는데, 선전관 신여정(申汝楨), 창의사(倡義使) 최경회(崔慶會)가 공격하여 왜군을 패퇴시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선조 26년 6월 명나라 경략(經略)의 요청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 보고한 내용에 “진도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도성의 함락이나 벽파진 앞 바다에서의 해전 등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어쨌든 남해에서 서해로 진출하는 길의 목덜미로 알려진 진도의 공략이 남해안 장악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왜군이 진도를 점령하고자 기도하였을 것임은 충분히 예견된다. 그러나 이순신 지휘하의 조선수군의 해로 차단 때문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순신은 1597년(선조 30) 울돌목의 지형을 활용해 명량(鳴梁)대첩에서 13척의 병선으로 적함 133척을 맞아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고 다시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열세를 면치 못한 왜군은 1598년(선조 31)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을 결정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도우려고 노량(露梁)에 이르렀고 11월 19일 왜와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결과]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 명, 왜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진도가 받은 피해 역시 매우 컸다. 현존 주민의 직계 선조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로 알려져 있는 점에서도 고려 말의 내지로의 이주에 버금가는 피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도의 지리적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고 있었다. 즉 1597년(선조 30)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가 진도의 지리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난으로 인한 피폐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종래 무신으로 가려 임명하였던 수령을 문신으로 교체하여 백성 다스리는 방도를 강구할 것을 청한 것이나, 상조도(上鳥島) 당동(堂洞)에 1707년(숙종 33) 남도만호(南桃萬戶) 소속의 별장을 파견하여 수군을 주둔시켜 관방을 삼은 일 등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조도 당동은 이런 연유로 이름을 맹성(孟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 맹성에 수군을 배치한 것은 명나라가 망한 후 명나라의 유신(遺臣)인 정성공(鄭成功) 등이 대만에 근거를 두고 명나라 부흥을 외치면서 청나라에 대항하다 1683년(숙종 9) 소탕된 뒤로 그 잔당들이 전라남도의 서남해안에 해적질을 다녔기 때문에 해안 지방을 방어하기 위한 조처로 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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