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남도 진주지역에 전승되는 가족의 정을 노래한 민요. 하종갑의 『진양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소리는 혼자 또는 여럿이서 부른다. 가사는 여섯 소절로 이루어져 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족간의 정이 나뭇가지만큼이나 많고, 그 정이 뿌리만큼이나 깊어지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대천지 한 바닥에 뿌리 없는 남이 나서 가지는 열두나 가지 잎은 피어서 삼백여섯 가지같이도 많은 정...
-
갈마정 우물과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관련 이야기.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속사리 속사마을[옛 사월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진양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남해 금산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올라가는 길에 속사마을[옛 사월마을]을 지나다 목이 말라 마침 갈마정 우물에서 물을 긷는 처녀에게 물을 청했다.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을 훑어 물 위에 띄...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위거(渭擧), 호는 지우당(至愚堂).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5대손]이며, 아버지는 강여완(姜汝完)이다. 학문과 인품으로 이름을 날린 강세준(姜世儁)의 아버지이다.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 모습이 이미 성인의 모습과 같았다. 집이 본...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여중(汝中), 호는 매촌(梅村). 호조참의에 추증된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27)에 출생하여 1627년(인조 5)에 별세한 무인으로, 일찍이 무예를 익혀 같은 시대에 무인으로 활약한 정기룡(鄭起龍)·주몽룡(朱夢龍)과 함께 ‘3룡(三龍)’으로 불렸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언술(彦述).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아들이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다음과 같이 강득윤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또한 청렴하고 근후하여 가훈(家訓) 3편을 지어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했다. 아버지의 상...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아들이다. 진주 진성면 지역에서 살았다. 품성이 효성스러웠고, 제사를 받들 때는 정성으로써 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길 때는 예로써 하였다. 가정을 이루어 분가한 곳이 3리쯤에 있었는데도 부모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 올리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나 큰...
-
고려 후기의 효자. 강안명(姜安命)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매양 이웃 노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니 아내와 상의하여 힘껏 준비하여 이웃들을 모셔와 즐겁게 노시도록 하였다. 때문에 살림이 날로 어려워져갔으나 아버지에게 절대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그 슬퍼함이 자심하였고, 장사를 지내는데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지성으로 해드려 이웃사람들의 칭...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군평(君平). 호는 매계(梅溪). 임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공을 세운 매촌(梅村) 강덕룡(姜德龍)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아우 강여완(姜汝完)과 함께 외삼촌 묵재(黙齋) 조석규(趙錫圭)에게서 학문을 익혔는데, 동학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고 한다. 일찍이 벽 왼편에 조석규가 쓴 ‘敬義誠愼(경...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성재(誠齋).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강관(姜琯)이며, 어머니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이다. 1495년(연산군 1)에 출생하여 1532년(중종 27) 37세의 나이로 늦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541년부터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고, 1544년에는 지평으로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박사 강계용(姜啓庸)의 아들로, 감찰어사를 지낸 강사첨(姜師瞻)의 아버지이며, 문하시중을 지낸 강창귀(姜昌貴)의 할아버지이다. 『진양지(晋陽誌)』에 의하면, 아버지 강계용과 함께 유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아버지 강계용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갈 때 따라갔다 왔으며, 뒤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또 서장관이 되어 다녀와서는 자손에게 경계하여...
-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준여(俊汝).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밀양부사를 지낸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의 후손이다. 진주 출신으로 평소에 효행을 실천하였다. 나이 겨우 7, 8세 때 아버지가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찢어 피를 입에 대어 넣으니 병이 나았다. 향리에서 경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리...
-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에 있는 군영 터. 진주는 통일신라 때 강주(康州)로 불리기 시작하여 수차례 변동을 거치면서 고려 초까지 강주로 불리었고, 이때 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진을 두었다. 『진양지』 고적편에 “강주지(康州池) 위에 옛 군영의 터가 있으니, 세상에 전해 오기를 고려 때 절도사가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라고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911-1...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벼슬을 여러 번 옮겨서 한림원의 직한림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진주향교에서 글을 읽었는데 남달리 학문이 뛰어나 글을 잘 지으니 한강 이남의 학동 중에서는 제일이라 하였다. 1212년(강종 1) 봄에 과거에 응시하려 하였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관원에게 호소하여 방면해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관원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형지(詗之). 아버지는 승지와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강자평(姜子平)이다. 1490년(성종 2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그 해에 정언으로 등용되고 이듬해 지평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장령이 되고 그 뒤 승진을 계속하여 1504년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일어난 갑자사화 때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晋州). 한림(翰林: 예문관 검열) 강흘(姜仡)의 5대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도순성장(都巡城將)의 직책을 맡아 진주성을 지키던 황진(黃進)의 부장으로서 빛나는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올랐으며, 그 공으로 인해 자손들은 대대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 진주시에 설립되었던 인쇄소. 진주지방에서 가장 먼저 평판인쇄를 도입한 인쇄소로, 1936년 9월 15일자 『영남춘추』의 인쇄인으로 등록되면서 진주 인쇄계의 선두로 자리매김하였다. 평판인쇄는 일반적으로 오프셋인쇄라고 하는데, 잉크가 묻는 부분과 묻지 않는 부분이 같은 평면상에 있는 데서 나온 말이다. 비록 일본인이 창업한 인쇄소이나 선명한 인물사진과 풍경사진을...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사당. 진주하씨의 사우로서, 하즙(河楫)·하윤원(河允源)·하자종(河自宗)·하계종(河啓宗) 등 4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하즙은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진천군(晋川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를 원정(元正)이라 하였다. 그 아들인 하윤원은 충혜왕 말년에 등제하여 경상, 서해의 안찰사를 지내고 원주와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명...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사우. 고려 초 거란에 끝까지 대항하다 순절한 충신 하공진(河拱辰)[?~1011]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804년(순조 4)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落水菴)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사를 일시 중지하였으며, 1869년 부조묘(不祧廟)로 되어 다시 자손 봉사하게 되었다. 하공진 장군의 “정...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홍지마을에서 지내는 산신제. 매년 7월 15일 백중날에 지내는데, 이 마을이 형성된 고려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예전부터 홍지마을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소를 방목했는데, 자연재해로부터 소를 보호하기 위해 산신령에게 제사를 올린 것이 이 우제의 시초가 되었다. 제의는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정자나무 아래에 음식을 차려 놓고 소의 무사와 마...
-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정자 조선 중기의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 700명을 이끌고 공을 세운 관란(觀灡) 허국주(許國柱)가 난이 끝난 후 청담리 염창나루 가에 이 건물을 짓고 은거하였다. 『속진양지』에 의하면, 허국주는 일찍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었다. 1812년(순조 12) 고장의 선비들이 임금에게...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산봉우리. 해발 228m의 봉우리로, 관지리 삭평마을 뒷산이다. 진주에서 손꼽히는 명산의 하나로 산꼭대기에는 널따란 암석이 있는데, 여기에 올라서면 주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봉화대가 있어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정상에서 불과 연기로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명석면을 굽이굽이 흘러 남강과 합류하는 나불천과 진주를 관통하는 남강과...
-
1991년 진양문화원에서 『진양지』·『진양속지』·『진양속지 증보』 등을 국역한 책. 모두 10권으로, 『진양지』4권, 『진양속지』4권, 『진양속지 증보』2권이다. 이 중 『진양지』는 조선 광해군 14년(1622)부터 인조 10년(1632)에 걸쳐 성여신(成汝臣)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 읍지로, 본래 2책으로 되었으나 목판본 인출 때 4권 3책으로 되었다. 그리고 『진양속지』는 19...
-
조선 전기의 효자. 광대로 효성이 깊어 『진양지(晋陽誌)』권3「효행조(孝行條)」에 실렸다. 어느 날 밤 호랑이가 군만의 아버지를 물고 달아났는데, 그는 하느님께 아버지가 무사하기를 빌며 활과 화살을 갖추어 산속으로 따라갔다. 날이 밝아 어느 골짜기에 이르니 그 호랑이는 이미 아버지를 다 뜯어 먹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고 있었다. 이에 군만은 “내 화살을 받아라”고 고함치며 살기어린...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봉곡리에 있는 사당. 공자(孔子)를 모시는 사당으로, ‘궐리’는 중국 산뚱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가 태어나서 살던 궐리촌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진주 이외에 충청남도 논산시의 노성(魯城)[충남기념물 제20호], 경기도 오산시의 궐동[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등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있다. 노성궐리사는 1716년(숙종 42)에 권상하·김만준·이건명 등...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상주. 자는 성인(成仁). 고려 때 직제학을 지낸 김후(金後)의 후손으로 군수 김녹돈(金祿敦)의 손자이다. 아들 김봉승(金鳳承)은 정유재란 때 진주 발재[鉢峴]에서 전사하였다. 출생년은 미상으로 산청의 단성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 1583년(선조 16) 북평사 이제신(李濟臣)과 함께 군관으로 출정하여 북쪽 야인을 격퇴하였으며,...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김해허씨 문중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신. 1649년(인조 27) 평안병마절도사 안주목사에 재직 중이던 허동립(許東岦)[1601~1662]이 진주의 하진(河溍)[1597~1658]에게 보낸 서신이다. 한 통에서는 하진의 약재 요구에 대한 답장과 아울러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었고, 또 다른 한 통에서는 하진의 완쾌를 비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남쪽의 통일신라[676~935]와 북쪽의 발해[698~926]가 양립하던 시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 북방에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을...
-
조선 중기의 효자. 진주 상사리에 살았다. 진주 어느 절의 노비로 미천한 출신이었으나 어버이에게 바치는 효성만은 누구 못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업고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힘을 다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고, 담제(禫祭: 대상을 치른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뒤 비로소 고기를 입에 넣은, 하...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에 있는 연자방아. 연자방아는 맷돌의 일종으로, ‘연자매[硏子磨]’라고도 한다. 둥글고 넓적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세로로 세워서, 이를 소나 말 따위로 하여금 돌리게 하여 곡식을 찧는 기구이다. 단목리의 연자방아는 1930년대까지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들판에 보존되어 있다. 밑돌 위에 곡식을 찧기 위한 작은 돌이 얹혀 있다....
-
1895년(고종 32) 11월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성년남자의 상투를 자르게 한 명령.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국제적 범죄를 자행한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일본의 지원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11월 15일 고종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실시한다고 선포하였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꽃. 조선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1451년(문종 1) 명나라에서 옮겨 심은 것을 여러 손을 거쳐 1675년(숙종 1) 남평문씨(南平文氏)인 문두징(文斗徵)이 이곳에 심은 것이다. 이곳에서는 처녀꽃이라 불리며, 20여 그루가 한데 보존되어 있다. 가방리 462번지[금산순환로426번길 5-13]에 위치하며, 현재 남평문씨 문중에서 이...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대암리에 있었던 초등학교. 1946년 7월 1일 집현초등학교 대암분교장으로 시작하여 10월 1일 대암분교장으로 개교하였다가, 1948년 4월 1일 대암초등학교로 승격 인가되었다. 1952년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1962년 9월 1일 새 교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이후 학생수가 줄어 1999년 2월 48회 졸업식을 하고 8월 31일 집현초등학교에 통폐합...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덕오리에 있는 고분. 1985년 10월 덕오리의 한 주민이 밭을 갈다가 발견된 돌창 1점과 돌살촉 4점을 국립진주박물관에 매장문화재로 신고하자 이 지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완형 민무늬토기 1점과 바닥 10여점, 그리고 몸통편이 대량 채집되었으며, 토제품으로 반파된 가락바퀴 1점과 그물추 1점이 채집되었다. 이밖에 석기로 도끼와 홈자귀, 대패날, 숫돌이...
-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에 있는 서원 터. 도동서원은 조선 초기 단종 때의 충절 신하였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김문기(金文起) 등 4위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그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이 서원도 훼철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단종을 위해 죽은 사화공신 중 1순위인 삼상(三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
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
-
몸의 단련을 위하여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돌. 들돌은 옛날의 놀이도구 겸 운동기구로 1930년대까지 마을 공동마당에는 크기가 다른 단단한 둥근 돌 2개 정도를 준비해 두고, 마을 청소년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데 이용하였다. 이 돌로 배 올리기, 어깨 넘기기, 던지기 등 시합을 하여 힘을 겨루었는데, 이처럼 드는 데 사용한 돌이라 하여 ‘들돌’이라 부르고 있다. 둥근 형태에 둘레가 12...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 재실. 진양하씨로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하천서(河天瑞)와 하경호(河慶灝) 부자의 재실이다. 하천서의 호는 망추(望楸), 하경호의 호는 읍추(泣楸)로, 하천서의 호를 본떠 망추정이라 하였다. 하천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대를 훈련시키고 허물어진 진주성을 수축하고 못을 깊이 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의 공이 인정...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 행하는 세시풍속. 달집이란 달맞이할 때에 불을 질러 밝게 하려고 생소나무 가지와 짚 따위를 묶어 쌓아 올린 무더기를 말한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마을의 태평과 풍년을 비는 뜻에서 행하는데, 나불마을과 동진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시행하여왔다. 정월 대보름날 달이 떠오르면 달집에 불을 지르고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고 놀면서 각자...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고분군.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산 187-2 일대에 있다. 1995년 11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구간 중 유적이 발견되자 문화재 보호 및 연구 차원에서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발굴작업을 하였다. 2개 지구로 나누어 오미리 산 187-2번지 외 약 4,300평...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내율마을에서 출토된 신상. 1950년대 말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 내율마을 주민이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묻힌 십이지신장상을 발견하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아직 제작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앞면에 글자가 새겨진 사각의 대좌 위에 신장상이 놓여져 있다. 신장상은 청동제 입상형태로 모자를 쓴 모양이며, 높이는 40.5㎝ 정도이다. 출...
-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진주. 호는 절강(折江). 함평 출신으로 1417년(태종 17)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좌사간(左司諫)을 지냈다. 세조 때 모친을 모시고 진주로 와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의 칭송이 높았다. 마침내 모친상을 당하여 상여가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물살이 세어 못 건너가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흐르는 물이 중단되어 강을 건너 장례를 치렀다....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에 있는 샘. 정평리 응석사 입구에 있는 샘물로, 바위 벽에서 스며나온 물이 바가지만한 샘에 고이면서 흘러넘친다. 물빛이 젖 색깔처럼 뽀얗고 질감이 부드러우며 뒷맛이 달콤하다. 예로부터 이 샘터에서 하늘을 향해 무지개가 아름답게 그려져 ‘무지개샘’이라고 불러왔다. 정평리 산 9번지 응석사(凝石寺) 일주문 옆에 있어 응석사행 차편을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는 문인석. 문인석은 묘 앞에 조성한 문신의 모습을 한 석상으로, 이 문인석이 있는 문산 갈천역 앞 안골 부근에는 조선시대의 분묘와 석물이 다수 위치하고 있어 다른 석물들과 함께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갈곡리에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높이 155㎝, 너비 48.5㎝, 두께 31.5㎝의 규격이다. 머리에는 관을...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옥산리에 있는 정려각. 조선시대 이 지방의 선비였던 김장운(金長云) 처 진주강씨와 아들 김명식(金命植)의 절개와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각이다. 김명식은 아버지가 등창이 나 고생하자 어머니와 더불어 정성껏 돌보며 하늘에 기도하여 낫게 하였으며, 또 상을 당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장사지냈다. 고을 선비들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정려각 건립을 건의하...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는 사당. 진주정씨의 사우로서, 정예(鄭藝)·정시양(鄭時陽)·정유(鄭裕)·정수균(鄭守均)·정홍차(鄭洪且)·정안사(鄭安社)·정수(鄭需)·정을보(鄭乙輔)·정이오(鄭以吾)·정황(鄭璜)·정분(鄭苯) 등 11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들 11위 중 진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이오, 정분 부자로, 정이오[1354~1434]는 고려 공민왕대에 나서 세종대까지 활약...
-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원숙(元淑). 본명은 준옥(準玉)이며, 부인은 하서리(河舒里)[1889~1970]이다. 1872년(고종 9)에 함양군 안의에서 출생하여 15세의 나이에 임시 관례를 치르고 의병장 노응규(盧應奎) 문하에서 항일의병에 참여하였다. 노응규가 1896년 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안의를 출발할 때부터 동행하여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서계(西溪). 능허(凌虛) 박민(朴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낸 박창윤(朴昌潤)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하달영(河達永)의 딸이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의하면, 1677년(숙종 3) 출생하여 1736년(영조 12)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706년(숙종 32) 사마시에 급...
-
조선 후기의 효부. 정유재란 때 일본군 정벌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딸로, 함양인 박태홍(朴泰弘)의 아내이다. 『증보 진양속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정숙하더니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공경하였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남편이 병사하니, 정씨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계심에 손수 염습과 장례를 치렀다. 이후 시부모를 지성으로...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초계(草溪).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병조판서에 추증된 변연수(卞延壽)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웠으며,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군공을 세웠다. 이어서 당포해전(唐浦海戰)에도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아버지 변연수와 함께 전사하였다....
-
조선 전기의 열녀. 변립(卞岦)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때 남편 변립이 그의 아버지 변연수(卞延壽)가 일으킨 의병을 따라 이순신 장군의 진으로 가서 군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당포싸움에서 부자가 모두 전사하자, 이를 안 김씨는 그 날로 자결하여 남편을 따랐다. 고종 때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하고, 숙부인을 추증하였다. 아버지는 나라에 죽고, 아들은 아버지에 죽고, 아내는...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오원(吾元). 변남룡(卞南龍)의 5대손이다. 1538년(중종 33) 출생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할 때까지 대의를 위하여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변훈남(邊勳男)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한 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수리에 있는 사찰. 1969년 음력 3월 창건하였으며, 정수리 378번지[진산로1497번길 65-10] 집현산 줄기에 위치한다. 대웅전과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는데, 특히 경내의 산신각은 1964년 겨울 절터 옆 응달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고 지었다 한다. 절터가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하고 있어 보림사의 호랑이 전설을 마을 주민들이 더욱...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의 교회. 1927년 8월 당시 호주 선교사가 설립한 시원여학교에 다니던 정남경에 의해 설립되었다. 정남경은 집안에 미신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용산리 조비마을의 야학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다가 아버지 소유의 밭을 얻어 예배당을 건립한 뒤 빅실교회라고 이름지었다. 빅실교회가 설립되어 예배를 올리자...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비. 1971년 7월 1일 3·1운동 5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이 있은 후,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이에 진주에서는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의 시위에...
-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지도로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으로, 1919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연 집회횟수 1542회, 집회 참여인원 200여 만명을 기록하며 평화적 시위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명, 피검...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 이 고분군 일대에는 현재 진주강씨 집안에서 만든 일명 ‘봉의 알자리[봉란대(鳳卵臺)]’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시가지가 형성되기 전에는 상당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학계에 의하여 가야시대의 고분으로 밝혀졌다. 고분의 규모는 제법 크며, 고분의 위를 평평하게 다듬어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姜以式)의 유허비(...
-
조선 중기의 무신. 당시 명사로 이름을 날린 서인원(徐仁元)의 동생이다. 출생연도는 미상이며, 1593년(선조 26) 제2차 진주성전투 때 진주목사로 있으면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숲속으로 도망쳐 있다가 살해당하였다. 본래 힘은 세었지만 어리석고 겁이 많아 무장으로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형 서인원이 당시 존경받던 명사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요지...
-
조선 말기의 의병. 본명은 서관성(徐寬成)으로, 함양군 안의(安義) 장수사 용추암의 승려 출신이다. 보기 드문 힘센 장사로서 1896년 진주의진의 선봉장을 맡아 노응규의 진주성 점령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각지에 파견되어 친일분자와 단발령 호응자를 처단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의 원한을 사 1896년 4월 20일경 거짓 향응을 제공받고 잠든 사이에 죽임을 당하였다. 일제의...
-
조선시대의 효부. 진양인 하경휴(河慶烋)의 딸로, 석정재(石楨載)의 아내이다. 『진양속지 증보』에 의하면 진양하씨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스럽더니 17세에 시집가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남편을 예로써 섬겼다. 시아버지가 우연히 낫기 어려운 병을 얻어 4년간을 병석에 눕자 백방으로 좋은 약을 구하고자, 집 뒤 산에 우물을 파고 매일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
신라시대의 승려이자 효자. 호는 거사(居士). 진주 출신으로 일리현(一利縣)[지금의 성주군] 법정사(法定寺)에서 수도하였다. 성주 법정사에서 수도 중 고향의 어머니가 병환이 위중함을 알고는 번민을 하자 큰스님이 이 사실을 알고, 가서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하라고 허락하였다. 성각은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지성으로 보살피고, 고기가 떨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끓여 드렸다....
-
조선 후기의 문신 성동일(成東一)[1753~?]이 발급받은 호패와 가족의 호패꾸러미 일괄. 성동일은 본관이 창녕, 호는 공금당(拱衾堂)이다. 횡성현감, 칠곡부사 등을 지내며 정사를 잘 돌보았다. 이 호패는 1780년(영조 4)에 발급받은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의 후손 성조석 댁에서 보관하고 있다. 재질은 나무이고, 길이 10.5㎝, 폭 2.2㎝, 두께 0.9㎝이다....
-
조선 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추지(樞之). 성종 때 교리를 지낸 성안중(成安重)의 손자로, 성일휴(成日休)의 아들이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면서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했으며,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서는 6년간의 시묘살이로 자식된 도리를 다했다. 어머니가 먼저 별세하여 서모를 모셨는데, 서모도 친모처럼 섬겼으며, 서동생들도 친동생같이 돌보았다. 서동생...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직제학을 지낸 성사재(成思齋)의 6대손이며, 성흔(成忻)의 아들이다. 출생연도는 미상이며 음서로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진주판관으로 발탁되어 군무를 맡아 성벽을 개수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등 전비를 갖춘 후 격문을 붙여 충의지사를...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浮査, 桴楂)·야로(野老). 우윤을 지낸 성두년(成斗年)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충절을 지킨 성여충(成汝忠)과 성여효(成汝孝)가 그의 형이다. 1546년(명종 1) 출생하여 1632년(인조 10) 86세로 별세하였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3세로 사...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목사 성이성(成以性)의 선정을 기리는 비. 성이성은 본관은 창녕, 호는 계서(鷄西)이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보고로 선정이 조정에 알려졌다. 후에 청백리로 뽑혔으며 사후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1657년(효종 8)부터 이듬해까지 진주목사를 지낸 성이성[1595~1664]이...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창녕. 자는 화백(和伯), 호는 죽와(竹窩). 인조 때의 학자 성여신(成汝信)의 후손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워 가난한 형편에도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버지가 죄를 입어 먼 곳에 귀양을 가게 되자 걸어서 서울까지 가 혈서로 아버지를 구해 달라는 호소문을 올렸는데, 열 손가락이 온전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왕이 그 지성스러운 효성에 감동하여...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밀양. 자는 화례(化禮), 호는 운암(雲菴)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으며, 자라면서 큰 뜻을 세우고 시를 지어 그의 회포를 나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로 진군하던 중 왜군을 만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고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조정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추증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의 대중가요 작곡가. 1913년 4월 23일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건너가 작곡을 공부한 후 귀국하여 평생 작곡생활과 출판 업무에 종사한 진주 출신의 대중가요 작곡가로서 본명은 손득렬이다. 1999년 1월 9일에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경신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3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고등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였다. 1932년...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대암리에 있는 고개. 집현면 대암리와 냉정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옛날 서울에서 내려오던 정승들이 잠시 쉬어 갔고, 조선의 명지라 해서 임진왜란 때 이곳에 왔던 중국의 이여송(李如松)이 맥을 끊어 놓았다는 고개이다. 이 고개 사이에 정수천(亭水川)이란 개울이 하나 있었는데, 나무다리를 세워 놓으면 유난히 빨리 썩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궁여지책으로 큰 나무...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 병사 겸 목사 신경원(申景援)의 선정을 기리는 비. 신경원[1581~1641]의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叔獻)이다. 1605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후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패전한 관군을 수습하여 반군을 대파함으로써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녹훈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분전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어 단식 항거하...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있는 비각. 조선 1718년(숙종 44) 9월 12일 숙종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위패를 모신 신당서원을 사액하고 예조좌랑 이안국(李安國)으로 하여금 제를 고하는 사제문비를 세우고 이를 보호할 비각을 세웠다. 조지서는 1474년(성종 5) 과거에 합격한 후 사가 독서하였으며, 연산군 때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내려왔다가...
-
경상남도 진주시의 특산물인 실크의 공동브랜드 명칭. 명주, 비단을 뜻하는 Silk와 시민을 뜻하는 Civilion의 합성어로 미래지향적인 면을 강조하고 세계화 개념에서 ‘실크시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진주의 견직은 1929년 대구에서 진주로 내려와 대안동에 설립된 동양염직소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역직기를 수입해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근대적 견직공장이 시작되었는데...
-
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1597~1658]이 받은 교지첩. 하진의 호는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양조은함첩』은 1633년(인조 11)부터 1657년(효종 8)까지 25년에 걸쳐 받은 교지첩으로,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진주하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다. 총 45매이며, 표지에 ‘양조은함첩(兩朝恩銜帖)’라 씌어 있다. 당시의 인사관리제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
-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 전승되는 어린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동요. 하종갑의 『진양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아이들끼리 놀면서 부르기 때문에 여럿이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가사는 다섯 소절로 되어 있으나 얼마든지 더 만들어 부를 수 있다. 어데끄정 왔노 안중안중 멀었네 어데끄정 왔노 동산 건너 왔네 어데끄정 왔노 어린아이들이 놀면서 상대방이 있는 곳을 물어보고 답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
-
임진왜란 중 잃은 관인(官印)을 다시 찾아 세운 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가 병마절도사 관인을 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이후 1747년(영조 23) 이 도장을 남강 물속에서 건져 당시의 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조정에 아뢰었다. 도장에는 ‘慶尙右道兵馬節度使印(경상우도병마절도사인)’이라 새겨져 있고, 1582년(선조...
-
고려 때의 효자.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성심껏 섬겼으며, 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3년간의 시묘살이를 정성껏 했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로상 위에 얹어 놓은 모래그릇을 물고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여효제는 자신의 효성이 까마귀보다도 못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크게 탄식하였다. 그러자 그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일 후면 그 모래그릇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진주시의 역사. 진주시는 경상남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도농 복합형 통합시로, 동쪽은 함안군, 서쪽은 하동군, 남쪽은 고성군·사천시, 북쪽은 산청군·의령군과 접하고 있다. 면적은 712.84㎢, 인구는 약 33만명이며, 1읍, 21동, 15개 면을 관할하고 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육도시이자 문화도시로, 현재는 첨단산업단지가 입지한 혁신도시로...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연계안(蓮桂案) 보관소. 연계재는 연계안을 보관하는 서재를 말한다. ‘연계’는 연방(蓮榜)과 계적(桂籍 : 문과 합격)의 첫 글자를 모아 지은 명칭으로, 연(蓮)은 사마시에 오른 사람을, 계(桂)는 문과에 오른 사람을 지칭한다. 1736년(영조 12) 사마소(司馬所)를 설립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단을 보존하였다. 1841년(헌종 7) 문과 합격자 명...
-
연관, 즉 담뱃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550여 년 전부터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에 담뱃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며, 때문에 이곳을 ‘댓방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을 윤태섭(尹泰燮) 옹이 이어받아 담뱃대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담뱃대는 꼭지 반지름, 몸통, 물치의 크기에 따라 소죽(小竹), 중소죽(中小竹), 중죽(中竹)...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 있는 재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 오위도총부총관을 지낸 허동립(許東岦)[1601~1662]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710년(숙종 36)에 후손들이 힘을 모아 지은 건물이다. 평소 연(蓮)을 좋아하여 후손들이 대문 밖 뜰에 못을 파고 연을 심어 연당(蓮塘)이라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807년(순조 7)에 중수한 것이며, 이...
-
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함양. 자는 재일(栽一). 『진양속지(晋陽續誌)』에 의하면,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진사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막하에서 왜적과 싸우다 불화살[火箭]에 맞아 전사하였다....
-
조선 후기 고창오씨 오현덕(吳顯德)의 호구 내용을 목사에게 제출한 문서.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를 할 때 호주가 가족사항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제출토록 하였는데, 이 호구단자는 1789년(정조 3)에 오현덕 집안에서 작성한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상평동 191-4[큰들로114번길 7] 후손 오홍재 댁에 소장되어 있다. 주소, 호주명, 연령, 본관, 가족내역, 처가의...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의령. 진주 출신으로 부인은 함안조씨이다.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지성으로 섬겼다.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해 병구완을 했다. 어느 날 의령까지 가서 약을 구해 진주로 돌아오는데 밤이 되고 비가 와서 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이때 마침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호위하여 인도하였으며, 스님이 나타나 사연을 듣고는...
-
통일신라시대의 호족. 처음 강양군(江陽郡) 의상현(宜桑縣)[泉州縣이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의 宜寧]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뒤에 강주(康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 지역도 석권하였다. 924년(경명왕 8)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를 자칭하고 중국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냈다. 927년에는 후당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장군(懷化將軍)으로 봉하자, 사신을 보내...
-
고려 전기의 문신. 예빈경을 지낸 왕유(王惟)의 아들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승진하여 감찰어사가 되어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여 칭송을 받았다. 뒤에 진주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어 경주로 전임하게 되었으나 진주 백성들의 청으로 1년을 더 유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을 뿐 아니라 절도가 있었으므로 모든 일을 백성에게 이롭게 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용두산에 얽힌 이야기. 진주시 문산읍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경남전설을 찾아서』·『진양민속지』 등에 수록되어 있다. 아주 옛날 문산에 한 신선이 살았다. 신선은 문산 사람들을 어떻게 잘 살게 할까 궁리하다가 용을 타고 용궁의 용을 만나러 나섰다. 신선이 용의 머리에 올라앉아 막 하늘을 오르려 하는데, 아침 일찍 빨래하러 나온 한 아낙네...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고분군. 일제강점기 때에 이미 조사되어 알려진 유적이다. 용산리 마을에서 절터라고 부르는 산쪽으로 500m 정도 오르면 2기의 고분이 있었는데, 고분 사이의 간격은 20m 정도로, 직경 9m, 높이 1.5m 정도였으나 도굴되어 파손된 상태이다. 고분의 동북쪽은 절터로서 사찰의 축대가 남아 있고, 사찰의 석물 몇 점이 발견되었다. 또한 주변에는...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사찰. 처음 이름은 용화사(龍華寺)라 하였는데, 용산리의 지명을 본떠 용산사라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유명한 스님과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아왔으며, 의곡사 주지였던 오제봉 스님이 이곳에 와서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1921년 진주의 박헌경이 사재를 희사하여 창건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사찰 앞에 작은 연못을...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수리에 있는 사찰. 1980년 2월 도원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정수리 345번지 연등산(蓮燈山) 자락에 위치한다. 연등산은 산의 모양이 연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웅전과 천불전, 칠성각의 불전과 약사여래불이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창건 이래 ‘법등명(法燈明)’이라 불리는 달력을 제작하여 『법구경(法句經)』의 부처님 말씀을 새겨 포교하고 있으며...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의 마을 우물과 관련된 신비스러운 이야기. 진주시 사봉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진양민속지』에 수록되어 있다. 사봉면 어느 마을에 승려 한 사람이 지나다가 길가의 집을 찾아들어 물 한 그릇을 청하였다. 집 주인이 잠깐 기다리라 하고 나갔는데,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물 사발을 들고 돌아왔다. 늦게 온 사연을 주인에게 물으니, 이 마을에 우물이 없어 이웃 마을에 가서...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 월아산 정상에 있는 기우단. 월아산 두 봉우리 중 북쪽 봉우리가 국사봉(해발 471m)인데, 일명 무지등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이곳에 기우단을 설치하고 가뭄 때 관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또한 이곳은 명당터로 소문이 나 세도가들이 암매장하였다가 파헤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 묘를 쓰면 산신령이 도와준다고 믿어왔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
고려의 문신 유홍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유홍림은 본관이 진주로서, 고려 말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호부상서를 지냈다고 전한다. 유홍림이 태어나고 또 벼슬을 그만둔 후 내려와 살던 터에 유홍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내리 원당마을에 위치한다. 비에는 ‘高麗尙書柳公(고려상서류공)’이라는 글체가 희미하게 보인다. 본래 이곳에...
-
조선 전기의 열녀. 임진왜란 때 부장(部將)으로 공을 세운 유홍(柳洪)의 딸이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진주성전투 때 왜적에게 붙들렸으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진주병사 윤선정(尹先正)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윤선정의 본관은 파평, 자는 은로(殷老)로, 1611년부터 1613년까지 진주병사를 지냈다. 윤선정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하며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진주병영 군졸들이 1614년(광해군 6)에 세운 유애비(遺愛碑)이다.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뚜껑돌을...
-
조선 전기의 열녀. 조선 전기의 선비 윤여훈의 처이다. 진주 가좌촌에 살았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의 진주성전투 때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내렸다.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조선 말기의 의병. 진주 출신으로, 승지 벼슬을 지내 윤승지(尹承旨)로 일컬어지던 인물이다. 일제의 기록에 전직 대관, 승지 출신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벼슬을 버리고 항일 의병투쟁으로 일생을 보냈다. 윤자승이 이끈 의병의 규모는 200명 정도였으며, 최대일 때는 600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로 진주 인근의 덕산·삼가·산청 등지에서 활약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장군 강민첨(姜民瞻)의 사당.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옥봉동의 강민첨 탄생지는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는데,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0년대에 사당과 정문, 그리고 재실을 신축, 정화하였다. 은열사는 강민첨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으며, 부속...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군수를 지낸 이호약(李好約)의 아들이다. 1557년(명종 12) 출생하여 1608년(선조 41) 51세로 별세할 때까지 무인으로 활약하였으며, 특히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다. 1584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영남 일대에 침입해오자 선봉에 서서...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중(汝重), 호는 월암(月菴). 성재(誠齋) 이예훈(李禮勛)의 후예이다. 이갈암(李葛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99년(숙종 25) 기묘년에 문과에 올라 사헌부 등에서 관직생활을 하며 명성을 얻었다. 만년에 진주 월아산 아래에 있는 동산에 정사를 세우고 편액을 ‘월암(月菴)’이라 하였다....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에서 지내는 당산제. 마을에 좋은 일만 있도록 동신에게 기원하는 제사로, 동제를 잘못 지냈을 적에는 마을이 해를 입게 된다고 믿고 있다. 당집은 없고 높이 10m 정도의 느티나무를 신목으로 여기고 있다. 느티나무 둘레에 토석(土石) 제단을 마련하고 거기서 제를 지낸다. 음력 1월 15일 새벽 2시에 지내며, 제관은 마을 이장이 맡아 3일 정도 정성을...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수일(李守一)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이수일[1554~1632]의 본관은 경주,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충무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왜군 격퇴에 공을 세우고 1603년 진주성을 증축하는 등 1605년 길주목사로 갈 때까지 진주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수일이 진주병사 재임 중 병사를 사랑...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이중광(李重光)의 묘비. 이중광[1592~1685]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이다. 청송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데 힘썼으며,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재령이씨 입향조이다. 병자호란 때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이중광이...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 있는 이천경의 비. 이천경은 본관이 합천이고 호가 일신당(日新堂)이다. 비문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짓고, 후손 이선(李璿)이 썼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오미마을 이천경의 묘 앞에 있다. 얕은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얹었다....
-
1910년 국권강탈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교통·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 재령이씨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말기의 건의문. 1901년 경상도 유림에서 이중광(李重光)[1592~1685]의 향례시 제물로 소요되는 소를 도축할 수 있도록 관찰사에게 허가를 신청하는 건의문을 올리자 이를 허가 처분한 문서이다. 100여 년 전의 공용문서로, 당시의 생활 모습 일부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에 있는 성지. 정 안토니오는 본명이 정찬문(鄭燦文)이다. 진주지역의 천주교 선구자로서 안토니오는 그의 영세명이다. 조선 고종 3년(1866) 12월 20일 천주교박해 때 남강 백사장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백사장에 버려진 목 없는 시신만이 수습되어 고향인 사봉면에 몰래 묻혀 그의 묘는 ‘머리 없는 무덤’이라는 뜻에서 무두묘(無頭墓)라고 불렸다. 그동안...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옥산리에 있는 비. 1694년(숙종 20)에 진주 유림들의 공의로 창건되었던 정강서원의 옛터에 세운 비이다. 정강서원은 창건 후 거유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유생들을 가르쳤고, 1720년에 이르러서는 9인의 학자를 배향 봉사하면서 구현사(九賢祠)라 하였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배향된 학자는 우곡 정온(鄭溫), 수헌 강숙경(姜...
-
조선 전기의 효녀·열부. 비록 천한 출신이었으나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의 난리 속에서도 늙은 어머니의 병을 지성으로 돌보았고, 세상을 떠나자 오래도록 어머니를 사모해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먹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언니와 함께 피난을 갔는데, 언니가 역질에 걸려 걷지 못하므로 그를 업고 30리길을 달려서 마침내 낫게 하였다. 또한 남편에게도 착실하여 모두 칭송하였다. 『진...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정기(鄭其)의 묘. 정기는 조선 전기의 학행이 출중한 징사(徵士)였으며, 진주 옥봉에 살았다. 한성소윤과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고 호조정랑을 지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오미마을에 위치한다.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고, 사각 석함이 원형 그대로이다. 석함 앞면에 주인공의 행적을 새겼으나 마멸이 심한 상태이다....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곤양.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진주정씨에서 분적한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중시조이다. 좌찬성에 추증된 정호(鄭浩)의 아들이다. 초명은 무수(茂壽)이나 1586년(선조 19) 무과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62년(명종 17) 출생하여 1622년(광해군 14) 60세로 별세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후 1590년 경상우도절...
-
조선 전기의 열녀. 강세승(姜世昇)의 딸로, 충의공(忠毅公) 정기룡(鄭起龍)의 아내이다. 임진왜란 이듬해 적을 피해 진주성에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삼에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죽음을 고하고,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시민(金時敏) 목사의 휘하에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을 만큼 용맹스러웠으며,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끝까지 왜군에 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이 되었다....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옥봉(玉峰). 고려 말 충신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후예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으로, 평생 충의로써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창의하여 최기필(崔琦弼)을 도와 왜적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최기필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의병의 왜적 토벌작전을 지원하다 제2차...
-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경(汝慶). 호는 봉곡(鳳谷).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 정문부(鄭文浮)의 장자이다. 평소 품성이 곧고 도량이 넓었으며, 젊어서부터 재상의 자질이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아버지 정문부가 말년에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별세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행지(行之), 호는 모렴(慕濂). 학포(學圃) 정훤(鄭暄)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머니의 상중일 때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도록 죽과 밥을 들지 않고 보릿가루를 물에 타 마셨다. 새벽과 저녁으로 묘에서 곡한 뒤 냇물을 건너 수 리나 떨어져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 보살펴 드렸다. 이 일을 비록 추울 겨울일지라도 그치지 않고 지성으로...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산 3-2 정분 묘 앞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정분은 본관이 진주로, 단종 때 우의정에 올라 왕을 보위하다가 수양대군 일파에게 유배당하였다가 처형된 문신이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1396~1454] 묘를 위하여 이곳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으로 인근 주민들이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산 3-...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수백(壽伯).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의 증손이다.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을 날렸으나 문과에는 실패하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어머니의 병환 때에는 귀한 물고기와 산삼을 구해 병을 고쳐 드렸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으로만 3년을 연명하며 예를 다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복하여 경상감사에게 알려 세금...
-
고려 후기의 효자. 선산군수를 지낸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아버지의 임지인 하동에서 동생과 함께 변경 수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때마침 왜구가 갑자기 침입하자 동생 정손(鄭愻)과 함께 병석에 있는 아버지를 호위하여 모시고 피란 갈 때 왜구들이 뒤쫓아 와 해치려 하자, 말을 달려 공격을 하며 사력을 다해 물리쳤다. 그러나 동생 정손은 적의 칼에 찔려 젊은 나이에 죽었...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호는 면재(勉齋). 평장사를 지낸 정연(鄭椽)의 아들이다. 1320년(충숙왕 7) 국자시에 합격하여 1345년(충목왕 1) 정당문학이 된 후 국정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1352년(공민왕 1) 당시의 권세가 조일신(趙日新) 세력의 배경으로 찬성사가 되었으나 곧 조일신이 주살되자 그 일파가 함께 투옥되었다가 광양군수로 좌천...
-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연일. 진주 출신으로 아버지가 내금위장을 지내는 등 유력한 가문의 후손이다. 일찍이 등과한 후 1896년 진주 의병장을 맡아 노응규의 진주성 점령에 큰 공을 세웠다. 의병투쟁이 끝난 후 의병이 해산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였다. 의병해산과정에서 함께 진주의병을 이끌었던 의병장 노응규를 투옥한 일로 인해, 당시 유림들에게 관군과 결탁했다는 비난을 받...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고...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낙이(樂而). 아버지는 진사 진복명(陳福命), 어머니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황진(黃璡)의 딸이다. 또 문인으로 이름을 떨친 진우(陳宇)가 그의 형이다. 1519년(중종 14) 출생하여 1568년(선조 1) 49세로 별세하였다. 1547년(명종 2)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검열·대교·정언·이조정랑·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60년 형조참의...
-
성여신(成汝臣)이 편찬한 경상도 진주목 읍지. 1622년(광해군 14)부터 1632년(인조 10)에 걸쳐 편찬하였는데, 정구(鄭逑)가 1587년(선조 20) 편찬한 『함주지(咸州誌)』(경상도 함안군 읍지)의 영향을 받아 그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필사본이다. 1730년(영조 6) 반포되었으며, 현재 규장각도서에 있다.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채색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제1책은...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전기 때의 장군 강민첨의 탄생유적지.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자 강감찬(姜邯贊) 장군을 도와 부원수로서 귀주전투에서 적을 격파, 전승을 거둔 바 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비각. 조선 말 가선대부 김상현(金尙鉉)의 정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와 그의 아들 전 의관(議官) 김정식(金正植)은 질병 등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던 주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뒤에 주민들이 “마을이 재난을 입었을 때 참다운 정성과 물자를 풀어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모자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2기를 각각 1901년과 1907년...
-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두문리 산 103-1번지에 있는 푯돌. 진주시와 사천시의 경계를 표시하여 이정표 역할을 하던 푯돌로 1991년 12월 2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천태산 마귀 할머니가 사천시의 두량리 큰골 방향에서 물레를 하려고 바위 3개를 옮겨 오는데, 1개는 머리에 이고, 1개는 지팡이로 짚고, 1개는 치마에 담아...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78번지에 있는 자웅을 상징하는 1쌍의 암석. 이 자웅석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 변에 누워 있던 것을 1970년 음력 3월 3일 옮겨 세우고 1973년 명석각(鳴石閣)을 준공하고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820-3에 위치한 삼선암(三仙庵)에 있는 고려시대의 동종.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삭실마을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범종으로, 수십 년 전부터 삼선암에서 관리하고 있다. 재료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1972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2010년 12월 21일 보물 제1698호로 승격...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있는 서당.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선조 시기에 이조참판·대사성을 지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모시기 위하여 1920년 지방 선비들이 건립하였다. 김우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서 학문을 배워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20권의 문집과 『속강목(續綱目)』36권을 지었다. 『속강목』은 동양사(東洋史)에...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전통정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자결한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18세손 박헌경(朴憲慶)이 일제강점기 때인 1922년 해마다 거듭되는 재해로 굶주림이 심하자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현재의 취로사업 형식을 취해 토지와 현금을 주어 이 정원을 조성케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서재. 우곡정은 고려 말의 문신 우곡 정온(鄭溫)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정온은 진주정씨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조선 태조 2년(1393) 이곳 진주에 서재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우곡정이라 하였다. 정온은 앞뜰에 못을 파고 백일홍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7[용암길 59-2]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본래 귀곡동에 있었는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정문부는 호가 농포(農圃)로,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길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그 전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다. 왜란...
-
진주강씨 부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각. 진주강씨는 임진왜란 때의 첨사 김진(金震)의 처이다.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 때 남편이 왜적에게 화를 당하자 칼로 왜적 13명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정려문은 1868년(고종 5)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가진리 744-1번지에 있다. ‘경렬문(景烈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
1895년(고종 32)에 진주목이 진주군으로 된 후 1939년 진양군으로 개칭될 때까지 진주의 행정구역 명칭. 1894년에 실시된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이듬해 5월 혁신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 어져 국초부터 시행해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구분하고 그 아래 337군을 두었다. 이때 진주에는 진주부가 설치되어 21군을 관할했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를 두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기독교 사회단체. 기독교청년회(YMCA)는 1844년 윌리엄스(G. Williams)가 영국 런던에서 창설한 단체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청년회가 창설된 것은 1903년 10월 28일이었는데, 당시 명칭은 황성기독교청년회였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이후 1913년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칭되었다가 현재는 기독교청년회로 불리고 있다. 2004년 현재 61개...
-
조선 후기에 진주목에서 편찬한 관찬 읍지. 진주지역의 역사, 지리, 풍토는 물론, 인물, 사건 등 모든 문화현상이 서술되어 있는 문헌으로 세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1832년(순조 32)의 임진본, 1871년(고종 8)의 신미본, 1895년(고종 32)의 을미본이 있으며, 이 중 임진본은 1991년 진주문화원에서 번역본으로 발간한 바 있다. 임진...
-
1862년(철종 13)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 1862년에 경상도우수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탐학에 반발하여 진주 출신 유계춘(柳繼春) 등이 일으킨 민란으로, 자진 해산하기까지 4일간 진주 일대를 휩쓸며 부정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였다. 이후 중앙조정에서 보낸 진주안핵사에 의하여 민란은 수습되었으나, 같은 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 후기...
-
진주지역의 전통산업인 견직양잠산업의 특산품. 진주지역에서는 삼한시대부터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이때부터 뽕밭을 조성하고 견직물을 생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근세에 들어서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견직공업의 선구는 1920년대에 진주에 설립된 동양염직소(東洋染織所)[현 대안동 우리은행 자리]이다. 당시 동양염직소는 일본에서 역직기를 수입해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근대식 견직공장의 시작을 열었...
-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고유한 향토음식으로 전해오는 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제사에 쓰던 나물과 탕국을 즐기던 음식의 형태로 지금은 그 맛이 약간씩 변형되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진주비빔밥의 독특한 맛은 사골국물로 밥을 짓는 데 있다. 밥 위에는 숙주·고추·근대나물 등을 얹어 보탕국과 같이 내는데, 동황색의 둥근 놋그릇과 흰빛의 밥테, 그리고 다섯 가지의 나물이 어우러져 일곱 가지 색...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귀부. 진주성 내에 있는 호국의 종각 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길이가 160㎝, 폭 140㎝, 높이 40~60㎝이다. 머리 부분에는 목 비늘이 새겨져 있고, 이빨을 조각하는 등 섬세하지만 등 부분에는 무늬가 없어 밋밋하다. 비좌의 크기는 75×15㎝이며, 귀부 자체는 4개의 발에 각각 발가락 3개씩, 그리고 꼬리를...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불상좌대. 합천댐 축조 때 합천군 봉산면 죽죽리 옛 절터에서 출토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석질은 화강암으로 상·중·하대석 중 중대석은 없고 상·하대석만 있다. 상대석 측면에 16엽의 겹꽃잎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위 테두리는 음각으로 돌려져 있으며, 한쪽에는 광배꽂이 구멍이 있다. 하대석은 8각형이며 한 변이 16㎝ 규모로 상하 2개...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벽돌기단. 건축물의 기단부를 벽돌로 쌓은 것으로, 원래는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죽죽리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옮겨와 복원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있는 진주성 내 박물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기단석 위에 일정 간격으로 높이 15㎝가량의 탱주(撐柱)를 세우고, 그 사이에 벽돌을 쌓은 다음 갑석을 덮었다. 사용...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는 1604년(선조 37) 이래로는 경상도 우병영, 1895년에는 진주관찰부, 1896년 이래로는 경상남도관찰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수령 이하 모든 관리와 일반인은 말에서 내리...
-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는 기독교 사회단체. 여자기독교청년회(YWCA)는 1855년 영국 런던에서 창립된 단체이다. 여자기독교청년회가 우리나라에 창설된 것은 1922년 4월이며, 정부수립 후인 1949년에 당시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았다. 2006년 현재 31개 지방에 조직을 갖고 있으며, 회원수는 200여만 명이다. 여자기독교청년회(YWCA)는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진주향교 입구에 있는 비. 진주향교 출입자를 통제하기 위해 세운 비로, 여기에 출입하는 자는 누구라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함을 알린 내용의 비이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향교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창건된 향교로, 임진왜란 때 불...
-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내려오는, 제사상에 올리는 반찬을 비벼 먹도록 만든 음식. 진주헛제사밥은 쌀이 귀했던 시절에 드러내놓고 쌀밥을 먹지 못했던 유생들이 저녁 늦게까지 글공부를 하다가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제사음식에다 향과 축문을 읽는 헛제사를 지낸 뒤 그 음식을 먹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비의 고장인 진주에서 선비들의 해학적 풍류가 만들어낸 전통 향토음식이라 할 수...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지내리에 있는 느티나무. 지내리 현동마을에 있는데, 1991년 1월 10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옛날부터 마을을 지나는 길손들의 쉼터였으며, 지금도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면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 아래서 ‘들돌’을 들어 올리는 힘겨루기를 했으며, 씨름판을 만들어 작은 축제의 장으로 사용하였다. 높이는 18...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창렬사를 중수하고 지은 글. 창렬사는 1607년(선조 40)에 건립되어 수차의 중수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심히 퇴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1962년 11월 15일 퇴락한 창렬사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여 창렬사 중수기를 지었다. 경상남도지사 명의로 되어 있으며, 창렬사의 건립 경위, 일제강점기 때의 퇴락 모습, 진주 유림들의 중수를...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서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촉석루 앞에 있는 임진왜란 삼장사(三壯士) 기념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판서에 추증된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조종도(趙宗道)[1537~1597],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로(李魯)[1544~1598]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삼장사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달라 국사편찬위원회의 유권해석과 경상남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1963년에 건립하...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문신,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一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화순] 출신. 고려 명신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최천부(崔天符)의 아들이다. 1532년(중종 27)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
-
조선 후기의 효자 추성원(秋成元)의 표창을 상신하고 답을 받은 문서. 추성원은 조선 후기 순조와 고종 때의 효자이다. 12~13살 때 부친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고, 어머니 창원황씨가 병마에 고통당하자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탕을 지어 올리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하동과 곤양 주민들 서른 명이 천하에 둘도...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었던 사우.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김시민의 신위는 창렬사(彰烈祠)주벽에 옮겨 모셨다....
-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
조선 말기의 무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우석(禹碩). 호는 사헌(思軒). 아버지는 하한조(河漢祖)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기찬(朴基欑)의 딸이다. 1825년(순조 25) 진주에서 출생하여 이우빈(李佑斌+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3년(철종 4) 무과에 급제한 후 부사과, 훈련원첨정 등을 지내고 1862년 거제도호부사로 나갔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순...
-
근대의 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峰) 또는 외재(畏齋).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하재익(河載翼)이며, 어머니는 김해김씨이다. 1870년(고종 7) 진주에서 출생하여 13세에 사서오경을 익혔고, 24세부터는 성리학을 논하기 시작했다. 27세 때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후 평생을 학문과 저술에 힘쓰다 1946...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출생하여 조선 건국 후인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상호군을 지냈다.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첨지총제로서 함경도 경원과 경성의 군사 요새지를 수비했으며, 세종 때에도 경기도 및 경상도의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1433년(세종 15)...
-
조선 전기의 선비·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공곽(公廓). 호는 매헌(梅軒).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상주에 갔다가 도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아버지를 베려 하자 하경휘는 소리를 지르며 자기 몸으로 칼을 막았으나 무도한 왜적은 부자를 모두 무참히 살해하였다. 뒤에 조정에서 하경휘의 효행을 기려 효자의...
-
조선 중기의 효자·의병. 본관은 진주. 자는 희가(希可). 호는 신당(新塘).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이 생전에 봉양을 잘 하였으며,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예에 따라 행하였다. 그의 4형제가 한집에 살았으나 전혀 다툼이 없이 화목하게 살아 고을 사람들이 ‘효우군자(孝友君子)’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
-
조선 전기의 열녀. 본관은 진주.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강응태(姜應台)의 손녀이며, 사직(司直)을 지낸 강렬(姜冽)의 딸이다. 남편은 하국보(河國寶)이다. 평소에 부도(婦道)를 잘 지켰으며,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에 왜적을 만나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으며, 『진양지(晋陽誌)』권3「열녀조(烈女條)」에 그 열행이 기록되어 있다. 뒤에 조정에서 절부의 정문(旌...
-
조선 말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삼(汝三). 조선 전기의 문신 하경복(河敬復)의 후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남원양씨 부인을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다. 그의 나이 14세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영약인 잉어를 구하기 위해 디딜방아 공이를 다듬어 읍내 장에 가서 팔려고 가다가 수곡의 조계마을 앞 길 위에서 쓰러져버렸다. 이튿날 햇살에 놀라 황급히 일어나 자기의...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있는 조선 중기의 선비 하락(河洛)의 신도비. 하락(河洛)[?~1592]은 본관이 진주, 호는 환성재(喚醒齋)이다. 1568년(선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추천받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아들 하경휘(河鏡輝)와 함께 왜군에게 피살되었다. 1903년 하락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웠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에 있는...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潾)이다.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한 후 1367년 감찰규정이 되어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좌천되었고,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여 양주로 유...
-
조선 후기의 문신 하범대(河範大)가 생전에 썼던 편지글과 과거시험 답안문. 서간첩은 하범대가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1837~1857) 사우 및 동료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수십 통을 모은 것이다. 과시문은 1837년 과거 볼 때의 답안문으로, 책문(策問 : 정치에 관한 대책), 시의(詩義), 부(賦), 강시(講試) 목록 각 1통씩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 진주하씨 후손...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경(子敬),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하위보(河魏寶)이며, 어머니는 참의를 지낸 이륜(李倫)의 딸이다. 뒤에 영모정(永慕亭) 하진보(河晋寶)에게 입양되었다. 1571년(선조 4) 태어나 최영경(崔永慶)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곽재우(郭再祐)를 찾아가 군무를 도와 공을 세웠...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이어 집의, 동부대언,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조계종...
-
조선 전기의 문신 하연(河演)의 묘. 하연의 본관은 진주,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65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판서·대사헌·대제학·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49년(세종 31) 영의정에 올랐다. 문종이 즉위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1453년(단종 1...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고려 말 공민왕 때 평안도 숙천군 수령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군관이 들어와 번잡하게 굴었으나 접대에 소홀함이 없었고, 정사를 함에 인의로써 근본을 삼아 형벌을 가볍게 하니 주민들의 칭송이 높았다. 후에 벼슬이 순흥부사에 이르렀다. 『진양지(晋陽誌)』권3「임관조(任官條)」에 이름이 올라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1344년(충혜왕 복위 5) 과거에 급제한 후 1363년(공민왕 12) 전공정랑(典工正郞)으로 있으면서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랐다. 1375년(우왕 1)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에 있으면서 임의로 정원 외의 연호군(煙戶軍)과 별민군(別民軍)을 두었다하여 파면 당하였다. 이때 후임으로 온 원수 유영(柳瑩)이 채...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원룡(元龍). 호는 영무성재(寧無成齋). 1540년(중종 35)에 태어나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효심이 깊고 우애가 남달리 뛰어나 3형제가 한 집안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항상 웃으며 사람들을 대했다고 한다. 명종 때 진사시에 합격한 후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이 되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이원익(李元翼)의 천거로...
-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응백(應伯), 호는 어은(漁隱)·초은(樵隱). 하맹산(河孟山)의 현손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영특하였으며 지조가 높았다. 또한 효심이 지극하여 『소학』의 「내칙(內則)」에 뜻을 두어 힘써 익히다가 닭이 울면 어버이 침소를 돌아보고 보살펴 드렸다. 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를 할 때는 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여막에서 지새니, 사람들이...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조선 중기 때 문신 하진(河溍)의 묘비. 하진(河溍)[1597~1658]은 본관이 진주, 호가 태계(台溪)이다. 1633년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다. 하진 묘비는 1675년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위치한 하진의 묘 앞에 있다. 얕은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뚜껑돌은 생략하였다. 전면의 ‘집의태계하공지묘(執義...
-
조선 후기의 문신 하진(河溍)의 상소문. 하진은 호가 태계(台溪)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이 상소문은 하진[1597~1658]이 나라에 올린 상소문으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고문서이다. 하진 상소문에는 사회 상황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대보(大甫). 호는 조산처사(螬山處士).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8년여 동안 서울에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의 열녀 정문을 내리게 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어머니는 열녀요 아들은 효자라.” 칭송하였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효행조(孝行條)」에 그 효행이 수록되어 있다....
-
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진주. 자는 자상(子常), 호(號)는 송강(松岡). 안주목사 하우치(河禹治)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생원(生員) 하위보(河魏寶), 어머니는 사천이씨(四川李氏)이다. 아내는 참의(參議) 정륜(鄭綸)의 딸 진주정씨(晋州鄭氏)이다.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을 뿐 아니라, 부모 섬기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애...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성경(成卿). 대사간을 지낸 하결(河潔)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어버이에게 드릴 고기가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스스로 방에 날아들어 그것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또한 어머니가 추운 겨울에 배를 원했으나 끝내 구해 드리지 못하자 이것이 한...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진주. 자는 여해(汝海). 진사 하협(河悏)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깨우쳤고, 성품과 행실이 효성스러웠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몸을 다하여 공경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의 시묘를 정성을 다하여 예로써 마쳤다. 후일 마을 사람들이 그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하효자 시묘골’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하광국(河光國)이며,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이광우(李光友)의 딸이다. 1593년(선조 26)에 출생하여 1666년(현종 7) 73세로 별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정성껏 치렀으며, 옛 성현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스스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촌부(村...
-
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청주. 자는 천뢰(天賚), 호는 유계(柳溪).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의 증손이다.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상중이었으므로 이를 통분히 여겨 “늙은 신하는 임금의 욕됨에 놀라 적개심에 불타는 마음 나라...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정평리에 있는 사찰. 1983년 7월 승려 묘찬이 창건하였다. 법화경의 도량으로 처음에는 절 이름을 여락사라 했다가 1988년 해룡사로 개칭하였다. 1995년 3월 현 정평리 520번지[응석로 234-13]의 도량으로 확장 이전하였고, 1997년에는 요사채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2001년 11월 부산에 포교원을 개원하였고, 2002년 4월 일본 오사카에 포교...
-
통일신라시대의 관리. 진주도독으로 있던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熊川州)[지금의 공주] 도독으로 있던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떨치면서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복속시켰다. 이때 향영(向榮)은 끝까지 복속하지 않고 저항하다 지금의 밀양으로 후퇴하였다....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호는 관란(觀瀾).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侯)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모집하여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염창강 언덕에 관란정(觀瀾亭)을 짓고 술로써 여생을 보냈다. 1812년(순조 12) 고장의 선비들이 조정에 임진왜란 때 허국주의 공을 알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
-
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김해. 자는 군무(君茂). 성품이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워 16세 때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써 3년을 더 연명시켰다. 그리고는 손을 항상 감추고 다니면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니 아버지가 타이르면서 몸조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서도 상복의 띠를 풀지 않고 3년을 시묘하였으나 불행하게도...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에 있는 허소유의 정려. 허소유(許小(由+己))는 고려 공민왕 14년(1363) 사헌부장령을 지낸 관리였다. 본명은 계도(繼道)이다. 1384년(우왕 10)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한 예를 지극한 마음으로 다하면서, 당시 침입한 왜구도 겁내지 않고 평소처럼 집례하는 것을 보고 그 효심에 감동하여 주위 수십 리에 침범을 금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허소유의 효성...
-
경상남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 내에 있는 종. 1980년 12월에 선조들의 거룩한 호국의 얼을 계승, 선양하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제작하였다. 호국의 종 주조는 김철호(金哲怙)가 맡았으며, 처음에는 1972년에 준공된 촉석문에 걸었다. 그러나 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자 촉석광장에 호국의 종각을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호국의 종각은 재일동포 최복순(崔福順...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있는 고려시대 문신 홍의(洪毅)의 신도비. 조선 영조 때 고려시대에 은청광록대부상서우복야(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를 지낸 홍의의 업적을 기려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계원리 홍지마을에 있다. 암반을 정밀하게 조각한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얹었다. 비의 제목은 ‘고려은청광록대부상서우복야(高麗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윤경(潤慶). 호는 송암(松菴). 장무공(莊武公) 황윤(黃潤)의 8대손이다.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 때 의병장이 되어 적을 거창의 소사평(素沙坪)에서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무신란은 청주 출신의 이인좌(李麟佐)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
조선 후기의 문신 황석강(黃石江)이 받은 양무원종공신녹권.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양무원종공신으로 책봉된 인물들에게 발급된 공신 증서로서, 1권 1책으로 구성된 활자본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된 1728년 7월에 양무녹훈도감(揚武錄勳都監)에서 발행해 나누어 주었다. 황석강[1687~1760]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李麟...
-
조선시대의 효자. 자는 운선(雲善). 통정대부 황계량(黃桂亮)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삯일을 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3년간을 자리에 눕게 되자 지성을 다하여 약을 달이고 하늘과 산신에 빌었다. 그가 약을 구해 밤중에 산길을 오는데, 그의 효심에 호랑이도 감동하였는지 그를 지켜주었으며, 의원집에 가도 사나운 개가 꼬리를 치며 반겨주...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의 5대손이며, 좌의정에 추증된 황윤공(黃允恭)의 아들이다. 1550년(명종 5) 출생하여 1593년(선조 26)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 일생을 무장으로서 활약하였다. 평소 인품이 중후하고 절개가 남달리 굳었으며, 힘세고 날쌨다.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
-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천곡리에 있는 비각. 경주김씨 김옥(金鈺)과 그 어머니 능성구씨(陵城具氏)의 열행과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 겸 비각이다. 김옥이 18세 때 아버지 김병규(金炳規)가 서울 관사에서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모셔 오던 중 혼절하므로 자기 손가락의 피를 내어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마침내 별세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극진히 모셨다. 1870년(...
-
부모를 극진히 잘 섬기는 아들. 효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효녀(孝女)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제도 하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관계가 우선적이었으므로 ‘효자’라는 용어가 ‘효도를 하는 자식’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일 등을 포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