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신라시대 지방제도인 9주의 하나. 신라 통일기의 지방제도를 9주 5소경제라 한다. 통일 이전에 신라는 전국을 5주로 나누어 지배하였으나, 삼국통일 이후에는 확대된 영토에 걸맞게 지방제도를 재편성했다. 종래의 상주, 하주, 한산주, 수략주, 하서주 가운데 하주의 영역을 문무왕 5년(665)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누어 동쪽 지역을 삽량주라고 하고 서쪽지역을 거열주라 하였다....
-
918년 왕건(王建)의 건국 이래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에 멸망할 때까지 34대 474년 간 존속한 왕조. 진주는 통일신라 말부터 후백제를 거치면서 강주(康州)로 불리다가 940년(태조 23)에 진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진주목이 되었다. 이에 앞서 광종 때에는 진주향교가 창설되어 진주의 학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고려...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외율리·덕곡리·계원리·신기리에 걸쳐 있는 산. 진주시의 서북쪽에 있으며, 산청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주 시내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광제산의 높이 420m의 산으로, 정상에는 산성터와 절터가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 세종 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광제산봉수대의 화구(火口)와 석축 일부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경상남도 기념물 제158...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관지리에 있는 산봉우리. 해발 228m의 봉우리로, 관지리 삭평마을 뒷산이다. 진주에서 손꼽히는 명산의 하나로 산꼭대기에는 널따란 암석이 있는데, 여기에 올라서면 주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봉화대가 있어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정상에서 불과 연기로 연락을 하였다고 한다. 명석면을 굽이굽이 흘러 남강과 합류하는 나불천과 진주를 관통하는 남강과...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에 있는 못[池]. 금산면 월아산 아래에 있는 못으로, 월아산에서 떠오르는 보름달이 금호지에 비칠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워 ‘진주 12경’의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가 약 5㎞로 굴곡이 많고 W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한눈에 못의 전부를 볼 수 없다. 금호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신라시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경상남도 진주시·함양군·산청군·의령군·함안군 일대를 흐르는 하천. 경상남도 거창군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진주시·함양군·산청군·의령군·함안군을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총 유로는 185.6㎞에 달한다. 남강은 산간 곡저를 흐르면서 함양군 유림면에서 위천을 합류하고, 산청군 생초면에서 임천을, 진주시 대평면에서 덕천강과 진주시 금산면에서 영천강을, 함안군 법수면에서 함안천을...
-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남쪽의 통일신라[676~935]와 북쪽의 발해[698~926]가 양립하던 시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935년까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한편, 통일신라 북방에는 698년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을...
-
경상남도 진주시와 산청군·사천시·하동군 일대를 흐르는 강. 『국역 진양지』에 “조흘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상류암을 거쳐 장항동(獐項洞)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 삼장천이 되어 살천(薩川)과 더불어 양당촌(兩堂村) 앞에서 합하니 이를 덕천(德川)이라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서 발원한 물과 지리산 계곡에서 흐르는 하천이 진주시 수곡면과 하동군 옥종면, 사천시...
-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에 있는 서원 터. 도동서원은 조선 초기 단종 때의 충절 신하였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苯)·김문기(金文起) 등 4위를 배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그후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이 서원도 훼철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단종을 위해 죽은 사화공신 중 1순위인 삼상(三相, 황보인·김종서·정분)을...
-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에 있는 산.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다.『진양지』에는 “망진산은 주(州)의 남쪽 강변을 넘어 6리에 있다. 『동국지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망진(望晉)은 곧 망진(網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망경’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살이를 와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늘 이산에 올라와 북쪽(서울)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이 있어...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과 함안군 군북면 경계 지점에 있는 산. 해발 고도 530.4m이며 경상남도 함안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방어산의 남쪽에는 여항산과 백이산, 동쪽으로는 삼봉산이 둘러싸고 있다. 또한, 서쪽으로 남해고속국도가 지나가며 정상에서 남강과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다. 과거 왜구가 침입했을 때 이를 물리치고 방어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현재도 방어산의 정상에는...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오원(吾元). 변남룡(卞南龍)의 5대손이다. 1538년(중종 33) 출생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사할 때까지 대의를 위하여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변훈남(邊勳男)에게서 수학하였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능하여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한 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과 평안동 뒷편에 있는 산. 『국역 진양지』에는 ‘집현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주(州)의 진산(鎭山)이 되고, 남으로는 망진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죽동이 있으며 또 대룡사와 소롱사가 있다. 모두 비봉으로 인한 것이요, 이러한 이름으로 한 것은 진압(鎭壓)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의 이름은 대봉산(大鳳山)이었다. 예로부터 진주강씨 집안에는 뛰어난...
-
경상남도 진주시 도동 뒤벼리 쪽에 있는 산. 진주시의 중심부 구시가지와 도동의 신시가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6~7부 능선까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묘지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주 등산로가 뒤벼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뒤벼리의 경치를 감상하려면 선학산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선학산은 특히 봄에는 복사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좋다. 식생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소나무가 주를...
-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에 있는 비각. 조선 1718년(숙종 44) 9월 12일 숙종이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1454~1504]의 위패를 모신 신당서원을 사액하고 예조좌랑 이안국(李安國)으로 하여금 제를 고하는 사제문비를 세우고 이를 보호할 비각을 세웠다. 조지서는 1474년(성종 5) 과거에 합격한 후 사가 독서하였으며, 연산군 때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내려왔다가...
-
절개가 높은 여자. 열녀는 일반적으로 위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하거나 남편을 위해 헌신한 여인을 일컬으며, 열부(烈婦)나 절부(節婦)를 통칭한다. 열녀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과부가 되면 마땅히 수절을 하여야 하고, 위난을 당하면 목숨을 바쳐 정조를 지키는 것이 부녀자의 도리로서 정착된 것은...
-
고려 말에 일본인 해적집단인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여 인명 살상과 재물을 약탈한 사건. 고려 말에 이르러 진주가 위치하였던 남해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왜구의 출몰이었다. 기록에는 고려시대를 통하여 약 500회의 왜구 침략이 있었고, 진주의 인근 해역에만도 31회나 침입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진주에서는 이와 같은 잦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379년(우왕 5...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용두산에 얽힌 이야기. 진주시 문산읍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경남전설을 찾아서』·『진양민속지』 등에 수록되어 있다. 아주 옛날 문산에 한 신선이 살았다. 신선은 문산 사람들을 어떻게 잘 살게 할까 궁리하다가 용을 타고 용궁의 용을 만나러 나섰다. 신선이 용의 머리에 올라앉아 막 하늘을 오르려 하는데, 아침 일찍 빨래하러 나온 한 아낙네...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용아리와 진성면 중촌리·하촌리의 경계에 있는 산. 일명 달음산이라고도 한다. 월아산은 남강을 허리에 두르고 있으며, 달음산고개(질매재)를 연결 고리로 주봉인 남쪽의 장군대산(482m)과 북쪽의 국사봉(해발 471m)이 이어져 있다. 월아산은 구릉을 이루고 있지만 숲이 아름다운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가족 단위의 주말 산행이나 한나절 산행으로 적합하며, 장...
-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 부쳐 쓴 글. 의기사는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논개의 사당으로,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건립한 것이다.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1802년(순조 2) 다산 정약용이 지은 것이다. 의기사 기문의 원문은 다...
-
1910년 국권강탈 이후 1945년 광복에 이르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 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설치한 교통·통신시설은 비록 그것이 근대적인 시설이었다 하더라도 설치목적과 그 기능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그리고 대륙침략의 병참기지화에만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정책에...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에 있었던 서원. 조선 숙종 28년(1702)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州) 하증(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등 다섯 분의 학문과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창건하였다. 그 가운데 하증은 어머니 진주강씨 부인이 왜놈에게 항절하다 죽음을 당하였기 때...
-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1392년(태조 1) 진주를 진양이라 하고 태조현비의 내향이므로 목을 높여서 진양대도호부라 개칭, 진양대도호부사를 두었다. 1402년(태종 2) 진양을 진주로 고치고 대도호부를 목으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대대적 개편 때 진주는 목으로서 정3품의 목사가 배치되고, 그 아래 판관(종5품)과 교수(종6품...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고려 전기 때의 장군 강민첨의 탄생유적지. 강민첨은 고려 전기의 명신 겸 장군으로 본관은 진주, 태어난 곳도 진주이다. 1018년(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자 강감찬(姜邯贊) 장군을 도와 부원수로서 귀주전투에서 적을 격파, 전승을 거둔 바 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비각. 조선 말 가선대부 김상현(金尙鉉)의 정부인 연안차씨(延安車氏)와 그의 아들 전 의관(議官) 김정식(金正植)은 질병 등으로 재난을 당하고 있던 주민들을 구원해 주었다. 뒤에 주민들이 “마을이 재난을 입었을 때 참다운 정성과 물자를 풀어서 마을 사람들을 구해준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모자의 시혜불망비(施惠不忘碑) 2기를 각각 1901년과 1907년...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 산 278번지에 있는 자웅을 상징하는 1쌍의 암석. 이 자웅석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숭배의 대상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 변에 누워 있던 것을 1970년 음력 3월 3일 옮겨 세우고 1973년 명석각(鳴石閣)을 준공하고 그 안에 보존하고 있다...
-
진주지역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조선 초기에 진주에는 강씨·하씨·정씨로부터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이성계는 진주 사정을 잘 아는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이곳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내려와 진주성에서 대봉산(大鳳山) 쪽을 바라보니 천하의 명당 자리였다. 대봉산은 “큰 봉황새가 사는 뫼”란 뜻인데, 무학대사는 이 산이 있기 때문에 진주에서 인물이 많이...
-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있는 서당.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선조 시기에 이조참판·대사성을 지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을 모시기 위하여 1920년 지방 선비들이 건립하였다. 김우옹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서 학문을 배워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20권의 문집과 『속강목(續綱目)』36권을 지었다. 『속강목』은 동양사(東洋史)에...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전통정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자결한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18세손 박헌경(朴憲慶)이 일제강점기 때인 1922년 해마다 거듭되는 재해로 굶주림이 심하자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현재의 취로사업 형식을 취해 토지와 현금을 주어 이 정원을 조성케 하였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서재. 우곡정은 고려 말의 문신 우곡 정온(鄭溫)이 은거하였던 곳이다. 정온은 진주정씨로 대사헌을 지냈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하다가 조선 태조 2년(1393) 이곳 진주에 서재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우곡정이라 하였다. 정온은 앞뜰에 못을 파고 백일홍나무 여섯 그루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상남도지방에서 차와 관련된 자연환경, 역사, 차인(茶人)들의 활동, 그리고 도구와 기물 등이 관련되어 이루어진 독특한 생활문화 풍토. 한자 ‘茶’는 ‘차’ 또는 ‘다’로 읽히나, 진주지방에서는 ‘차’로 많이 읽히므로 ‘차’로 쓰고자 한다. 차(茶, tea, cha)는 마시는 음료로써, 몸과 마음의 건강과도 관련되고, 자연과도 연관되면서 차생활·차예술·차...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등 39위와 모든 군졸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였다. 1607년 창렬사라 사액되었고, 1712년(숙종 38) 병사 최진한(崔鎭漢)에 의하여 중수되었다. 김시민 목...
-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117[용암길 59-2]에 있는 사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본래 귀곡동에 있었는데, 1995년 남강댐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였다. 정문부는 호가 농포(農圃)로, 함경도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길주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그 전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다. 왜란...
-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진주는 고려 초기 청주(菁州)라 하였다가 다시 강주(康州)로 환원하였고, 983년(성종 2) 2월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하면서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성종 14년(995) 9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치되어 10주 37현을 통할했다. 현종 9년(1018...
-
1895년(고종 32)부터 정부수립 후인 1949년까지의 진주 행정구역 명칭.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그동안 시행해오던 8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하고, 그 아래에 336군(郡)을 설치하는 획기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부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
-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고유한 향토음식으로 전해오는 비빔밥. 진주비빔밥은 제사에 쓰던 나물과 탕국을 즐기던 음식의 형태로 지금은 그 맛이 약간씩 변형되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진주비빔밥의 독특한 맛은 사골국물로 밥을 짓는 데 있다. 밥 위에는 숙주·고추·근대나물 등을 얹어 보탕국과 같이 내는데, 동황색의 둥근 놋그릇과 흰빛의 밥테, 그리고 다섯 가지의 나물이 어우러져 일곱 가지 색...
-
경상남도 진주시의 행정 및 민원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기관. 진주시를 대표하는 지방자치행정을 담당하는 기초자치단체로서 진주시 의회에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관리하는 주체기관이다. 진주시정을 운영함에 있어 부자치단체장 등 보조기관과 소속행정기관, 하부행정기관을 두어 행정의 민주성과 능률성을 도모하고, 주민의 복지증진과 지역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에 진주...
-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월아산 해돋이, 진양호 노을 등 여덟 곳의 비경. 진주는 예로부터 산과 들과 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고을이다. 조선시대 대표적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형승조(形勝條)」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지은『파한집(破閑潗)』의 내용을 인용하여 “진양의...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진주향교 입구에 있는 비. 진주향교 출입자를 통제하기 위해 세운 비로, 여기에 출입하는 자는 누구라도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함을 알린 내용의 비이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은 비로,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진주향교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창건된 향교로, 임진왜란 때 불...
-
경상남도 진주 지방에 내려오는, 제사상에 올리는 반찬을 비벼 먹도록 만든 음식. 진주헛제사밥은 쌀이 귀했던 시절에 드러내놓고 쌀밥을 먹지 못했던 유생들이 저녁 늦게까지 글공부를 하다가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제사음식에다 향과 축문을 읽는 헛제사를 지낸 뒤 그 음식을 먹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비의 고장인 진주에서 선비들의 해학적 풍류가 만들어낸 전통 향토음식이라 할 수...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있는 서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은열공(殷烈公) 정신열(鄭臣烈)과, 고려 말 물레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木棉, 목화) 옷을 입게 한 문충공(文忠公) 정천익(鄭天益)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이다. 두 분은 각각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본래 대평면 마동에 건립되었으나, 1868년(...
-
조선 후기의 효자 추성원(秋成元)의 표창을 상신하고 답을 받은 문서. 추성원은 조선 후기 순조와 고종 때의 효자이다. 12~13살 때 부친 추민중(秋敏中)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 드렸고, 어머니 창원황씨가 병마에 고통당하자 산중을 헤매며 약초를 캐어 탕을 지어 올리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소생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인근 하동과 곤양 주민들 서른 명이 천하에 둘도...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 진주성 내에 있었던 사우.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운 진주성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김시민의 신위는 창렬사(彰烈祠)주벽에 옮겨 모셨다....
-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충신은 전통시대의 사상을 포괄하여 내려오는 용어이지만, 나라에 충성함은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기본적 덕목이다. 이러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후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충신들은 그 마음이 항상 나라와 임금, 그리고 겨레를 위하는 일념에 차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영달이나 어느 한 집단의 권력 쟁취를 위하여 공을...
-
조선 말기의 무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우석(禹碩). 호는 사헌(思軒). 아버지는 하한조(河漢祖)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박기찬(朴基欑)의 딸이다. 1825년(순조 25) 진주에서 출생하여 이우빈(李佑斌+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53년(철종 4) 무과에 급제한 후 부사과, 훈련원첨정 등을 지내고 1862년 거제도호부사로 나갔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순...
-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에 출생하여 조선 건국 후인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한 후 상호군을 지냈다. 1410년에는 무과중시에 다시 급제하여 첨지총제로서 함경도 경원과 경성의 군사 요새지를 수비했으며, 세종 때에도 경기도 및 경상도의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1433년(세종 15)...
-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하공진(河拱辰)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순흥부사를 지낸 하윤린(河允潾)이다.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한 후 1367년 감찰규정이 되어 신돈(辛旽) 문객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좌천되었고,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여 양주로 유...
-
국가목적 또는 공익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정부의 제반활동과 상호작용. 진주시의 행정구역은 면적 712.84㎢이며, 1읍 15면 21동을 통할하고 있다. 1995년 이후 진주시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25% 정도이며 연령별 분포는 20대가 전체인구의 13.5%로 가장 많아 교육도시로서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65세 이상 노령인구 분포는 11.3%로 도내 시지역 평균(6.8%)...
-
경상남도 진주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백정(白丁)들의 신분해방운동. 형평운동은 1923년 4월 진주에서 조직된 형평사(衡平社)의 활동을 일컫는다. ‘저울[衡]처럼 평등한[平]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社]’란 뜻을 가진 형평사의 주목적은 가장 차별받던 천민 백정들의 신분해방이었다. 이때 백정들 가운데는 일반인을 능가하는 자산가가 많았고,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분의 불평...
-
부모를 극진히 잘 섬기는 아들. 효자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효녀(孝女)가 있지만, 전통적인 가족제도 하에서는 부모와 아들의 관계가 우선적이었으므로 ‘효자’라는 용어가 ‘효도를 하는 자식’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일 등을 포함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