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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700645
한자 四一九革命
이칭/별칭 4월 혁명,4·19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혁명|사회 운동
관련인물/단체 인천 공업 고등학교|인하 공과 대학|인천 사범 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4월 19일연표보기 - 인천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수봉산 등지에서 침묵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20일 - 인천 사범 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에서 시가행진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21일 -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이 4·19 혁명 희생자 위령식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24일 -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이 4·19 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
발생|시작 장소 인천 공업 고등학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지도보기

[정의]

1960년 4월,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학생과 일반인 등이 참가해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민주주의 혁명.

[개설]

4·19 혁명은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 선거에 맞서 1960년 4월, 학생들이 주도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으로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지역에서는 인천 공업 고등학교, 인천 사범 학교, 인하 대학교 학생 등이 시위에 앞장서며 인천 지역의 4·19 혁명을 이끌어 갔다.

[역사적 배경]

1960년 3월 15일 시행된 정·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정권이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면서 전국적으로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1960년 3월 15일에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3·15 마산 의거가 일어나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발포하며 체포·구금하는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였다. 이어서 1960년 4월 11일, 시위 도중 행방불명된 마산 상업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발견되자 학생·시민들이 총궐기하면서 4월 19일 ‘피의 화요일’로 이어졌다.

[경과]

1960년 4월 19일, 지금의 인천 기계 공업 고등학교 전신인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주안동 소재 인천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 중에 학교를 나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위치한 수봉산을 지나며 침묵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20일, 지금의 경인 교육 대학교 전신인 인천 사범 학교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청과 시장 앞 대로에 집결하여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 학생 데모 총칼로 막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동 동인천역으로 시가행진을 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60년 4월 21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용현동 소재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이 인천광역시 중구 답동 광장에 모여 4·19 혁명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식을 가진 후 “민주주의 바로잡자.”, “경찰국가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에서 시위를 전개하였고, 1960년 4월 24일에는 차량을 이용해 시내를 돌며 4·19 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여 『기호 일보』에 전달하였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경찰 기능이 마비 상태에 이르자 인하 공과 대학 학생들은 인천 지역 고등학생들과 함께 경찰을 도와 인천 지역의 치안과 질서 유지에 참여하였다.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며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의의와 평가]

4·19 혁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부정한 정권을 전복시킨 혁명으로 자유·민주·정의의 4·19 혁명 정신은 민주주의의 지표로서 현재까지도 계속 계승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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