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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89
한자 壬辰倭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정의]

1592년에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되어 1598년까지 밀양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전쟁.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벌인 전쟁인데, 명나라가 참전함으로써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으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임진년] 4월에 처음 부산으로 침략을 시작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나아갔다. 이후 명나라의 참전과 의병의 활약으로 남해안에 왜성(倭城)을 축조하여 주둔하면서 강화 회담을 벌였지만, 강화 조건이 맞지 않아 결렬되었다. 이에 1597년[정유년]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철수하였다. 일반적으로 7년 전쟁 전체를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이라고, 중국에서는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 밀양 지역은 일본군의 주요 침략로 중에 하나였던 제1로[중로]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초기부터 일본군의 침략을 직접 받았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전쟁 초기부터 군·관·민이 합심하여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한 지역이 밀양 지역이었다. 이후 강화 회담이 진행되자 조선에게 밀양 지역은 일본군을 추격하는 최후 보루로 인식되었지만,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거점 지역을 점선 점령하여 운송로를 확보하면서 약탈을 시도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에 밀양 지역은 전쟁 기간에 계속하여 일본군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정유재란 시기에는 일본군의 우군(右軍)이 전라도로 침략하는 진격로로 삼으면서 밀양을 침략하자, 밀양의 관군과 의병이 항쟁하였다.

[역사적 배경]

14세기에 조선 건국 이후 동북아시아의 조선, 명, 일본 세 나라는 각각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차츰 안정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지배층은 조선 내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특히 전쟁과 관련이 있는 군사 문제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먼저 민의 유망으로 군사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조선 초기의 봉족제(奉足制) 붕괴로 대립(代立) 현상이 나타나는 등 군역(軍役) 조달 체계가 혼란스러웠으며, 군사 방어 체제가 군사 수의 감소를 반영하여 진관(鎭管) 체제에서 제승방략(制勝方略) 체계로 변화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명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이라는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조선이 맞닥뜨리게 된 직접적이며 강력한 충격이 바로 일본의 침략인 임진왜란이었는데, 조선은 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무너졌다.

반면에 일본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하여 전국(戰國) 시대가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가운데 장기간의 전쟁으로 축적된 다이묘[大名]들의 무력을 해외로 돌리고, 신흥 세력의 등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의 망상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의 조선 침략에는 왜변(倭變)으로 조선·명과 단절되었던 교역의 문제점을 외교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군사력으로 타개하려는 야욕도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은 건국 이후의 안정 속에서 지배 세력인 양반들이 국방 문제에 소홀하였으며, 공납(貢納)과 부역(賦役) 체제도 와해되면서 많은 문제점이 사회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문제는 밀양 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밀양의 절대적인 인구수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전체 인구수와 군역 징발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의 지배층은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하던 일본이 노골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반면 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나섰다. 특히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정벌의 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 전역에서 군사와 선박, 군량을 동원하여 집결시켰다.

[밀양 지역 임진왜란의 경과]

7년 전쟁 임진왜란은 크게 임진왜란 개전기, 강회담기, 정유재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은 17만여 명의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서 조선 침략을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지휘 아래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제1군은 부산포를 침략하여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4월 15일 동래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3로(路)로 나누어서 북쪽으로 침략하여 나갔다.

전쟁 초기에 조선의 관군이 쉽게 패배하면서 일본군은 큰 저항 없이 한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6월 이후 조선팔도에서 의병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직접 격파하였으며, 이순신(李舜臣)이 이끈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먼저 전쟁 초기 밀양 지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전투는 작원관 전투로 불리는 밀양전투였다. 일본의 제1군에 의하여 부산의 동래성이 함락될 즈음 밀양부사 박진(朴晉)은 3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지원을 가고 있었는데, 동래성 북쪽 소산역(蘇山驛)에서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을 만났다. 박진은 이각과 함께 일본군의 북상을 막고자 하였지만, 군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분산되어 박진은 밀양으로 돌아왔다. 더욱이 이때 언양을 거쳐 다시 울산의 좌병영으로 복귀하였던 이각은 밀양의 군사권을 장악한 좌병영의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영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金睟)는 진주성에 있다가 군사를 밀양으로 보낼 것을 지시하고는 자신도 밀양으로 이동하였지만, 지휘 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김수는 병력이 밀양과 양산 사이 낙동강 가의 요충인 작원관(鵲院館)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양성을 빠져나가 문경(聞慶) 이하 경상도의 군사를 대구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감사 김수는 병력의 모집과 동원을 돌보지 않고, 피난 격문(擊文)을 보내는 활동에 그치고 있었다.

이처럼 경상도 최고위 지휘관들이 제대로 된 대응 없이 후퇴하는 동안 일본군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양산을 지나 4월 18일 밀양 쪽으로 북진하여 왔다. 이에 밀양부사 박진은 병력을 수습하여 작원관에서 좁은 길목을 점거하여 일본군의 밀양 진입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박진 군의 좌·후방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오히려 항쟁하던 박진의 군사들이 퇴각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이 밀양성을 공격하자 박진의 군사들은 밀양성의 군기고(軍器庫)와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밀양성을 탈출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4월 18일 밀양성을 쉽게 점령하였다. 결과적으로 작원관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였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이후에 밀양 지역에서 지속적인 항쟁이 전개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밀양부사 박진은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승진하였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일본군의 침략성을 경험한 밀양에서는 의병의 활발한 활약이 있었다. 밀양 지역의 의병운동은 피난처이던 형제골을 거점으로 전개되었다. 밀양 의병은 지리적 요충을 이용한 게릴라 전법을 적극 구사하여 전공을 세웠다. 소수 밀양 의병의 활동이 전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의병의 창의에 향토 수호 의식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향촌 지배 세력이었던 재지사족들의 철저한 전술과 전략의 준비, 재지사족의 재지적 기반이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 가운데 학연과 혼맥 등으로 연결된 밀양의 재지사족 가문들은 의병운동에 필요한 군사와 군량 부담 등 경제적 지원에서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밀양 출신의 인물들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의병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의승장 유정(惟政), 정인홍(鄭仁弘)의 중군장(中軍將)으로 낙동강 방어에 앞장선 손인갑(孫仁甲),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도 여러 밀양 인사들이 활동하였다.

다음으로 강화 회담 시기에 밀양 지역은 강화 교섭의 교두보이자, 군량 운송과 사절 내왕의 교통로로서 조선 영토에서 최후 보루로 중시되었다. 일본군은 한성 점령 후 팔도분군(八道分軍)에 따라 경상도에는 모리 테라모토[毛利輝元]의 군사가 배치되었는데, 낙동강 연안의 50~60리 내외마다 부대를 주둔시키는 거점 점령이자 점선 점령을 하였다. 이때 밀양 지역에는 1,500명 내외의 일본군이 주둔하였는데, 이어서 일본으로부터 하시바 히데카츠[羽紫秀勝]가 지휘하는 제9군이 군량을 운송하면서 지원 병력으로 도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양 지역에서는 일본군의 약탈이 더욱 심해졌다. 더욱이 일본군을 추격하여 내려와서 대구와 밀양 사이를 왕래하던 명나라 군사들에 대한 지원도 밀양 지역에서는 큰 부담이 되었다.

한편 강화 회담이 진행되자 일본과 명나라도 모두 밀양을 주요 거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밀양 지역은 일본군이 이용하는 수로(水路) 가운데 한 곳이었으며, 명나라 사신의 지공(支供)의 경로이자 강화 회담을 위하여 떠나는 출발점이었다. 이처럼 밀양 지역은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의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일본군이 조선의 소식을 파악하기 위하여 내왕하는 장소이자, 생포하였던 일본인을 돌려주는 교환의 장소였다. 따라서 밀양 지역은 강화 회담 진행 중에는 군사들의 휴식처였으며, 전쟁이 재개되면 가장 먼저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유재란 때 밀양 지역은 일본군 우군(右軍)의 침입로에 위치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밀양을 요충으로 인식하여 철저히 대비하였다. 이에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권응수(權應銖)의 지휘 아래 전쟁을 대비하도록 조처가 이루어졌다. 반면에 일본군은 우군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 서생포를 출발하여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군과 합세하여 군사를 움직이면서 양산, 밀양을 지나 창녕으로 진격하여 갔다. 다만 요충지였던 밀양 지역에서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밀양에 비축하여 둔 군량을 처리하는 문제가 조정의 우려 사항이었다. 그리고 밀양 지역에 거주하던 항왜(降倭)를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어렵게 되자, 밀양의 항왜는 방어사의 관할 아래 두도록 임시 조치하였다.

[밀양 지역 임진왜란의 결과와 의의]

임진왜란은 조선에 막대한 혼란과 영향을 끼친 전란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명, 일본의 동아시아 삼국에 큰 영향을 주어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밀양 지역에서도 일본군의 침략과 이에 대응한 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많은 백성들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또 전쟁 중에 군공(軍功)이나 납속(納粟)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 신분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속오군(束伍軍)이 지방군의 주력이 되면서 밀양 지역의 하층민도 군인이 되었으며, 토지의 결수(結數)는 전쟁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조선 사회를 지속하기 위해서 국가에서는 성리학 질서를 강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밀양 지역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임진왜란의 공신(功臣)에 선정되었으며, 정려(旌閭)를 받았다. 또 재지사족들과 임란 공신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書院)·사우(祠宇) 건립과 같은 추승·현창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선대의 임진왜란 때의 활약상을 기록하는 실기(實記)와 유사(遺事)가 간행되었다. 이를 통하여 밀양 지역의 재지사족들은 향촌 사회를 지속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밀양 지역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던 인물들이 많으며, 관련된 문화유산들도 많이 남아 있다. 밀양의 곳곳에 남아 있는 임진왜란 관련 공간들은 지역의 역사를 알려 주는 소중한 공간이자 생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간을 전쟁을 기억하고 현재를 사유하는 장소로 활용한다면, 새로운 역사 문화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며,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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