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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036
한자 永思亭
영어공식명칭 Yeongsajeong Pavilio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청룡2길 52-2[용성리 39]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지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37년연표보기 - 영사정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18년 - 영사정 개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3년 - 영사정 여재각 신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3년 - 영사정 경내에 여재각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3월 - 영사정 망주석 이전
현 소재지 영사정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청룡2길 52-2[용성리 39]지도보기
원소재지 영사정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청룡2길 52-2[용성리 39]
성격 재실
양식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문화류씨 곤산군파 문중
관리자 문화류씨 곤산군파 문중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에 있는 조선 전기 재실.

[개설]

영사정(永思亭)은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재실(齋室)이다. 여재각(如在閣), 망주석(望柱石), 의비연개비(義婢蓮介碑)가 함께 있다.

[위치]

영사정(永思亭)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에 있다.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에서 삼랑진 방향으로 약 600m 떨어진 도로변에 ‘용성리’라는 큰 돌에 새긴 마을 표지석이 있고, 표지석 옆 길을 따라 들어가면 청용동회관이 나온다. 청용동회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마을 공동주차장 앞에 영사정이 보인다.

[변천]

영사정은 1637년 부정(副正) 류창무(柳昌茂)의 아들 찰방(察訪) 류광윤(柳光胤)이 창건하여 학문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1918년에는 류영우(柳瑩右)가 개축하면서 재실(齋室)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에 류창무와 류창무의 6대 선조를 추모하기 위하여 재실 뒤에 여재각(如在閣)을 지었다. 망주석 중 좌측 용대와 망주석은 19세손 형조참판 류흥종의 묘소에 있었고, 우측의 망주석은 20세손 공조참판 류소창과 정부인 흥양류씨 묘소 앞에 있던 것이다. 1998년 3월에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경상남도 밀양시로 묘를 이장하면서 도난의 위험 때문에 영사정으로 옮긴 것이다.

[형태]

영사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영사정’ 현판이 걸린 재실, 여재각, 망주석, 의비연개비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여재각은 재실 뒤에 있는 있는데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있다. 제사 때마다 새로 작성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나무에 새긴 특별한 지방(紙榜)이 있다.

망주석은 한국전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었던 바,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의비연개비에는 임진왜란 전후 문화류씨 가문에 있었던 연개라는 노비의 사연이 담겨 있다. 당시 경상북도 칠곡군의 문화류씨는 명문가였으나 굶주림과 질병이 끊이지 않아 현손들이 잇달아 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그래서 류응이 처가인 경상남도 김해시 활천동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류응의 아들 류청춘이 25세에 요절하고 류청춘의 아내인 조씨가 유복자 류창무를 얻게 되었다. 의비 연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26세손인 류창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고 한다. 연개는 류응부터 류창무의 아들 류광윤까지 4대에 걸쳐 헌신하여 사라질 뻔한 위기에 놓인 가문을 살려냈다고 평가받은 바, 후손들이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영사정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에 세거하는 문화류씨의 향촌 활동을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일반적이지 않은 나무로 만든 지방, 화려한 망주석은 눈여겨볼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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