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01
한자 結束- 連帶- 强調- 同姓-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석태

[정의]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조선시대 명현의 후손들이 형성한 동족마을의 분포와 고택 문화.

[밀양의 동성마을 개관]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명현(名賢)으로서 밀주오현(密州五賢)을 일컫기도 하고 밀주팔현(密州八賢)을 일컫기도 한다.

밀주오현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신(李申), 밀양변씨(密陽卞氏) 변계량(卞季良),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종직(金宗直), 밀양박씨(密陽朴氏) 박한주(朴漢柱), 평산신씨(平山申氏) 신계성(申季誠)을 말한다. 밀주오현은 조선 전기까지 밀양 출신으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밀주오현의 후손이 밀양에서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경우는 재령이씨 이신 후손과 평산신씨 신계성 후손의 두 문중이다.

밀주팔현은 밀양변씨 변계량, 밀양박씨 박증영(朴增榮), 일직손씨(一直孫氏) 손조서(孫肇瑞), 여주이씨(驪州李氏) 이광진(李光軫), 창녕조씨(昌寧曺氏) 조광익(曺光益), 밀성손씨(密城孫氏) 손기양(孫起陽), 아산장씨(牙山蔣氏) 장문익(蔣文益), 벽진이씨(碧珍李氏) 이이두(李而杜)를 말한다. 시대를 조선 후기로 내려서 밀양 출신으로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 가운데 밀양박씨 박증영 후손이 청주로 옮겨 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 후손들이 밀양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다. 이 후손들의 동족마을은 얼마 전까지 밀양의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던 대성(大姓)들의 분포와 대략 일치한다.

특히 이와 관련 관련하여, 밀양의 4대성으로서 방조(榜曺), 진리(進李), 여리(驪李), 후박(後朴)이 일컬어진다. 각각 초동면 오방리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창녕조씨(昌寧曺氏), 무안면 내진리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벽진이씨(碧珍李氏), 활성동 살내마을 일원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여주이씨(驪州李氏), 부북면 후사포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밀양박씨(密陽朴氏)를 가리킨다. 여기에 다시 교동산외면 다죽리 죽동(竹東)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밀성손씨(密城孫氏), 산외면 다죽리 죽서(竹西)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일직손씨(一直孫氏), 부북면 전사포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광주안씨(廣州安氏), 부북면 전사포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평산신씨(平山申氏), 하남읍 귀명리 일원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광주김씨(廣州金氏), 부북면 퇴로리 일원에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함평이씨(咸平李氏)를 합하여 밀양의 10대성이라고 한다. 이들 밀양 10대성의 동족마을은 대략 조선 후기에 형성되어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로 해체되기 이전까지 존속하였다.

[밀양의 동성 한옥 마을 성립 시기]

밀양의 10대성 중 동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곳으로 들어온 때가 조선 전기로 올라가는 성씨는 여주이씨 한 문중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조선 후기에 와서야 동성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곳으로 들어왔다. 이와 같이 동성마을 성립 시기가 조선 전기로 올라가기 어려운 것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밀양 지역의 사족사회가 거의 해체될 정도로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밀양 지역 사족들은 자신들의 원래 거주지에 살지 못하고 밀양 내 다른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거나 아예 밀양을 떠나 다른 고을로 옮겨 간 경우가 많았다.

설사 임진왜란 이전 자신들이 살았던 거주지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선대 재사(齋舍)나 누정(樓亭) 등을 재건할 정도의 경제력을 회복한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50년 이상이 경과한 1700년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당연히 그전까지 자신이 거주할 가옥을 반듯하게 세울 생각을 갖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밀양 동성마을의 성립 시기는 조선 후기로 내려가고, 한옥 마을 성립 시기는 그보다 더 내려와 180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가능하였다. 이때가 되어서야 밀양 지역 사족들은 넉넉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성 일족의 한옥 마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밀양에서 동성 일족이 한옥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곳은 교동마을의 밀성손씨다죽 죽서마을일직손씨 두 문중이다. 그리고 근대 전후에 부북면 퇴로리로 들어와서 가까운 일족의 한옥 마을을 이룬 경우는 부북면 퇴로리 여주이씨와 같은 부북면 청운리 광주안씨의 두 집안까지 모두 네 곳이다.

[밀양의 동성마을과 고택 문화]

1. 밀성손씨 교동마을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밀양향교 아래에 위치한 밀성손씨 동성 한옥 마을이다. 조선 후기 현종 때 손성증(孫聖曾)이 들어와 살면서 밀성손씨 동성마을이 되었다. 교동마을은 밀양향교 정문과 연결되는 남북으로 난 긴 마을 안길을 중심으로 크게 동촌(東村)과 서촌(西村)으로 나뉜다. 한옥은 동촌에 7채, 서촌에 3채의 10채가 남아 있다. 동촌은 손영배, 손병구, 손병일, 손병순, 손정규, 손대곤, 손대식 가옥의 7채이고 서촌은 손병준, 손정식, 손대식 가옥의 3채이다. 건축 시기는 대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이다. 이 중 중심이 되는 가옥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교동 손씨 고가 손영배 가옥이다.

교동 손씨 고가 손영배 가옥밀양시 교동 731번지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61호] 명칭은 밀양 교동 손씨고가이다. 밀양향교에서 가장 가깝고 마을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촌 중심 가옥이다. 만석꾼집 또는 열두대문집으로 불리는 99칸 대저택으로 손성증이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안채는 1880년대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1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서로 긴 1,000여 평의 대지 위에 서쪽은 안채를 중심으로 한 안마당과 동쪽으로 ㄹ자형의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사랑마당, 대문채의 행랑마당, 그리고 중사랑채가 있는 중사랑마당으로 동선 구분이 명확한 전형적인 도시형 배치 형태를 이룬다. 동남쪽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좁고 길어 통로 역할을 하는 행랑마당이 있다. 행랑마당 정면에 중사랑채로 통하는 협문이 있고 우측의 행랑채에 난 중문을 통하여 사랑마당으로 연결된다. 사랑마당은 사랑채와 一자형의 곡간채, 행랑채가 ㄴ자형으로 일체화된 부속채가 중사랑채 및 안채로 통하는 안중문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랑채 뒤편에는 연못과 석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지고 후원이 조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낮은 동산을 중심으로 수목을 심어 놓았다. 사랑대청 배면의 유리창을 열면 후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마당에서 좌측으로 2m 정도 높이의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통하여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一자형 안채와 2동의 각기 다른 부속채가 ㅁ자형의 안마당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높이 차이는 경사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안채의 좌측 화계(花階)에는 대나무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건물들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안채와 사랑채를 사이에 두는 북쪽에는 가묘를 두고 있다.

밀양 교동 손병구 가옥밀양시 교동 779번지[동촌]에 있다. 국가등록문화재[제151호]이다. 마을 안길을 사이에 두고 손영배 가옥과 마주 보고 배치되어 있는데 손영배 가옥에서 분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채는 1915년경에 지어졌고, 사랑채는 1937년에 지어졌다. 교동마을 한옥 중에서 밀양 교동 손병구 가옥밀양 교동 손병순 고가는 마을 안길에서 뻗어 나온 고샅을 통하여 대문채로 진입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두 가옥 모두 대문채 앞에 짧은 고샅을 두고 대문을 90도로 틀어 배치함으로써 마을 안길을 가운데 두고 인접한 두 집의 대문이 대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두 가옥의 고유한 공간적 성격을 확보하면서 불필요한 외부 시선으로부터 주거 내의 사생활을 보호할 필요성에서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손병일 가옥은 밀양시 교동 792-1번지[동촌]에 있다. 안채는 멸실되었고, 사랑채는 1880년대에 건립되었다. 손영배 가옥 바로 밑에 위치하며 지금은 사랑채만 남아 있고 안채가 있던 곳은 빈터로 바뀌어 있다. 밀양 교동 손병순 고가밀양시 교동 783-1번지[동촌]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00년대 전후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84호]이다. 손정규 가옥은 밀양시 교동 790번지[동촌]에 있다. 안채는 1851년, 사랑채는 1800년대 후반에 건립되었다. 손대곤 가옥밀양시 교동 789번지[동촌]에 있다. 안채는 190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멸실되었다. 밀양 교동 손대식 고가밀양시 교동 787번지[동촌]에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75호]이다. 안채는 1901년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35년에 건립되었다. 밀양 교동 손병준 고가밀양시 교동 796-3번지[서촌]에 있다. 안채는 188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886년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85호]이다. 손대식 가옥은 밀양시 교동 809-1번지[서촌]에 있다. 안채는 188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880년대에 건립되었다. 밀양 교동 손정식 고가밀양시 교동 810번지[서촌]에 있다. 안채는 186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86호]이다.

2. 일직손씨 다죽마을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죽서마을(竹西마을)일직손씨 동성 한옥 마을이다. 8대가 무과(武科)를 거쳐 병사(兵使) 등의 주요 무관직을 지냈기 때문에 8병사 가문이라고 일컬어진다. 중산(中山)의 줄기에서 내려온 꾀꼬리봉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동쪽에 평전산(平田山), 서쪽에 다원동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죽의 옛 이름은 죽원(竹院)이고, 일명 다원(茶院)이라고 한다. 죽원이라고 한 것은 마을의 동쪽에 있는 평전산 기슭에 대숲이 무성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고, 또 다원이라고 한 것은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한옥들은 꾀꼬리봉 바로 아래 죽서마을에 있다. 다죽리 죽서마을일직손씨 동족 한옥 마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손호(孫顥)가 마을에 입촌한 후부터로 알려져 있다. 한옥은 모두 5채이다. 그중 중심이 되는 가옥은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밀양 다죽리 손씨고가 손기윤 가옥이다.

밀양 다죽리 손씨고가 손기윤 가옥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37-1번지에 있다. 안채는 183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830년대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11호]이다. 죽서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한옥으로 손병사 고택(孫兵使故宅)으로도 불린다. 1800년대에 이 집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남서쪽에 배치된 정면 3칸의 대문채 정면에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으며 사랑마당 우측을 돌면 안마당으로 진입한다. 안마당 위[북쪽]로는 남향한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 좌측의 광과 우측의 아래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뒤쪽에는 별도의 후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안채의 뒷 담장 너머는 대나무 밭이 있다.

손용상 가옥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39번지에 있다. 안채는 191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멸실되었다. 손기윤 가옥 바로 아래에 있다. 다죽리 죽서마을 한옥 중에서 유일하게 가묘(家廟)가 있다. 손우헌 가옥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35번지에 있다. 안채는 1900년대 초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00년대 초에 건립되었다. 손직상 가옥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41번지에 있다. 안채는 멸실되었고, 사랑채는 1890년에 건립되었다. 손완헌 가옥은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228번지에 있다. 안채는 1912년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멸실되었다.

3. 광주안씨 청운마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華嶽山)에서 이어지는 고암산(高巖山) 능선 동쪽에 위치한 광주안씨 동성 한옥 마을이다. 1840년대에 광주안씨 안붕언(安鵬遠)이 부북면 전사포에서 이주한 뒤 광주안씨 동성 한옥 마을이 형성되었다. 부북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마을은 도촌(道村)[본땀]과 상촌, 중촌, 적항의 4개 자연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원래 청운마을은 적항리였고 덕곡 일부와 대항리의 일부까지를 포함한 큰 마을이었다. 청운리의 본땀인 도촌은 냇물을 경계로 상촌과 중촌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옥은 모두 4채이다. 주로 19세기 말에서 1920년대까지 건립된 것이다.

밀양 청운리 안씨고가 안병기 가옥밀양시 부북면 청운리 631-6번지에 있다. 안채는 1870년대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890년대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13호]이다. 청운마을의 한옥 중 가장 먼저 지어진 가옥이다. 안붕언의 맏아들 안종문(安鍾文)이 1870년대에 안채를 먼저 지었고, 다시 안종문의 아들 안동수(安東洙)가 1890년대에 사랑채를 지었다. 마을 내 한옥인 안세환 가옥은 안종문의 친아우 안종익(安鍾翊)의 가옥이고, 안재명 가옥과 안병석 가옥은 안동수 사촌아우의 가옥이다. 안세환 가옥밀양시 부북면 청운리 632번지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10년대에 건립하였다. 안재명 가옥은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 644번지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10년대 초에 건립하였다. 안병석 가옥은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 604번지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20년대에 건립하였다.

4. 여주이씨 퇴로마을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퇴로마을은 여주이씨 이익구(李翊九) 후손들의 동성 한옥 마을이다. 화악산(華嶽山)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좌우에는 대항리위양리가 있다. 조선 초기 처음 입주한 것은 재령이씨이고, 경주최씨(慶州崔氏)와 순창설씨(淳昌薛氏)도 함께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흩어져 버리고 얼마 뒤 함평이씨가 들어와 살았다. 1890년 여주이씨 이익구가 아우 이능구(李能九)·이명구(李命九)와 함께 단장면 무릉리에서 이주하여 살면서 여주이씨 동성 한옥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 퇴로마을에 이익구서고정사(西皐精舍) 외에도 이능구의 용현정사(龍峴精舍)와 이명구의 삼은정(三隱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익구의 후손 가옥만이 아니라 이능구·이명구 후손의 가옥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이익구 후손 가옥 3채만 남아 있다. 모두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밀양 퇴로리 이씨고가 이근성 가옥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19번지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1890년대에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12호]이다. 이익구의 맏아들 이병희(李炳憙)가 물려받아 이어 온 가옥이다. 이만백(李萬白)의 종가로 칭하고 가묘를 갖추고 있다. 이우성 가옥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20-2번지 이근성 가옥의 좌측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38년에 건립되었다. 이병희의 둘째 아들 이재형(李載衡)이 분가하면서 지은 가옥이다. 이병수 가옥으로도 일컬어지는 이희문 가옥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13번지 이근성 가옥이우성 가옥 아래쪽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1910년대에 건립되었다. 이익구의 차자 이병수(李炳壽)가 분가하면서 지은 가옥이다. 밀양 퇴로리 근대 한옥이라는 명칭의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의의와 평가]

동성 한옥 마을이 형성된 시기가 밀성손씨 교동마을이나 일직손씨 다죽마을보다 뒤인 광주안씨 청운마을[1840년대]과 여주이씨 퇴로마을[1890년]을 가지고 보자면, 밀양 동성 한옥 마을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드러난다. 밀양 동성 한옥 마을은 후일 대종가로 자리 잡을 가옥이 마을의 제일 안쪽에 위치하고 그 아래와 좌우로 지차(支次) 아들들과 그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살게 된 가옥들이 담장을 함께 하여 차례로 이어져 있다. 이리하여 혈연적인 친소(親疎)와 위계(位階)가 자연적으로 지워져서 유교적 종법질서(宗法秩序)가 구현되는 형태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교가 소멸되어 가는 근대 전후에 이와 같이 유교적 종법제(宗法制)의 이상을 가옥의 배치에 드러나도록 마을을 형성하여 소멸되는 유교적 가치를 굳게 고수하려고 한 의식이 특히 돋보인다. 여주이씨 퇴로마을의 경우, 동성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일족이 동계(洞契)와 동약(洞約)을 만들어서 시행하였다.

밀양의 동성 한옥 마을은 비록 조선 후기에 형성되고 1800년대에서부터 근대 초기까지 지어진 가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밀양 선비들이 전통 유교의 가치를 당시에 굳게 고수하려는 의식을 가옥 배치와 마을 형성에서조차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측면에서 우리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큰 가치를 가진다. 더욱이 개별 가옥 내의 건물 배치도 근대 전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새로운 가옥 구조를 따르지 않고 전통 한옥의 건물 배치를 잘 따르고 있는 것도 같은 의식의 소산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시대 선비들의 유교적 가치를 거의 잊은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과거의 한때, 과거 선비들의 일상의 한때를 살펴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이 소중한 지역의 문화유산을 교육과 체험의 공간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폭넓게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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