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19
한자 學問- 文章- 先祖- 出版文化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석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4년 - 성종 『점필재집』유고 수집 지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7년 - 정석견 『점필재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97년 - 『이존록』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20년 - 강중진 『점필재집』 재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81년 - 『근사록』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49년 - 『점필재집』과 『이존록』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89년 - 『점필재집』 목판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9년 - 『점필재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0년 - 『속이존록』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2년 - 『점필재집』과 『이존록』 삼중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7년 1월~1917년 4월 - 『성호문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8년 - 안희원 『성호전집』 판각 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 『성호전집』 간역 재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 『성호전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5년 - 『밀성박씨향산파대동보』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0년 - 『사죽당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 『소눌집』 문집 초고 정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3년 3월~1933년 12월 - 『소눌집』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 『어변당실기』 목활자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6년 - 『밀주징신록』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 『점필재집』과 『밀주시선』 간행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김종직 점필재문집 및 이존록 목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12월 29일연표보기 - 이익 성호전집 목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년 - 노상직 소눌문집 책판외 20종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지정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조선시대부터 근대 전후 우리나라 출판을 선도한 출판문화.

[밀양 출판문화의 개관]

경상남도 밀양의 출판문화는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관련 기록이나 출판물 또는 그에 대한 책판 등 실물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후부터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관청과 사찰이 중심이 되어 여러 출판물이 간행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관청과 사찰보다는 향교와 서원 및 문중 등 민간에서 다수의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관청 출판물로 조선 전기에는 경서(經書), 예서(禮書), 역대 명현(名賢)의 시문집, 과문 학습서(科文 學習書), 전대 명현의 문집과 저작 등 11종이 간행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예서(禮書) 1종과 밀양부사 개인의 선대 문집 1종의 2종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사찰 출판물로는 만어사(萬魚寺), 표충사(表忠祠), 표충사(表忠寺), 영은사(靈隱寺), 봉천사(鳳泉寺)에서 14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불서(佛書) 17종, 사명당(四溟堂) 등 승려 문집 4종, 사찰지(寺刹誌) 1종, 사찰 제영(寺刹 題詠) 1종의 23종이 간행되었다.

향교, 서원, 문중 등 민간의 출판물로 조선 전기에는 후일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이름이 바뀐 점필서원(佔畢書院)[덕성서원(德城書院)]에서 1581년 『근사록(近思錄)』을 목판으로 간행한 것과 1479년 일직손씨(一直孫氏) 손윤한(孫胤漢)이 『격재집(格齋集)』을 목판으로 간행한 것 등 2종이 확인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향교, 서원, 문중 등 민간에서 많은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특히 1800년대 후반기부터 1900년대 전반기까지 근대 전후 약 100년 동안에는 출판물의 간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그것도 한문으로 된 다수의 유교 출판물을 주로 목판, 다시 말하면 책판으로 제작해서 간행하였다.

이처럼 경상남도 밀양에서 근대 전후에 유교 출판물의 책판 제작이 선비 문화를 주도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큰 성황을 이루었다. 선비 문화, 곧 유교 문화가 소멸되어 가던 시기에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도리어 유교 문화를 되살려내려는 듯 열광적으로 유교 출판물의 책판 제작에 집중한 것이 특히 주목된다.

[밀양 출판문화의 특징]

근대의 석판 인쇄 방식이나 활판 인쇄 방식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한문 서적을 인쇄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금속활자나 목활자를 가지고 판을 짜서 인쇄하는 활자 인쇄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목판에다 글자를 새긴 책판을 제작하여 인쇄하는 목판 인쇄 방식이다. 이 가운데 고려시대 이래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된 한문 서적 인쇄 방식은 목판 인쇄 방식이었다. 목판 인쇄 방식을 선호한 것은 활자 인쇄 방식보다 소요되는 비용도 저렴하고, 서적을 오래도록 널리 보급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다만 목판 인쇄 방식은 책판을 제작하는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였다.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근대 전후에 선현과 선조의 문집 또는 저작 등이 주를 이루는 유교 출판물의 책판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책판 제작 비용을 보면 1917년 제작된 이익(李瀷)『성호문집』 27책 926장에 소요된 1,860원을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화폐로 환산하면 총 1억 2096만 원이 드는 것으로 계산되고, 또 책판 1장당 제작 비용은 현재의 화폐로 약 13만 원이 든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당시 경제 규모나 화폐 가치 등을 감안할 때, 실제 가치는 이것보다 서너 배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거액이 드는 유교 출판물의 책판을 근대 전후에 다수 제작한 것은 경상남도 밀양의 경제적 풍요에 힘입은 바가 크다. 경상남도 밀양은 조선 후기부터 낙동강·밀양강과 그 지류 주변의 농토가 확장되면서 농업이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로와 남해 바다를 통한 물산의 획득과 교역이 용이하였고, 1905년 이후로는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면서 교통의 요지로서 여러 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래서 근대 전후 시기 경상남도 밀양은 ‘천 석 살림으로도 부자 소리를 듣기 어렵다’라고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몹시 풍요로웠다.

이와 같은 경제적인 풍요의 바탕 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고조된 문화적 욕구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래도록 침체되었던 지역 학문의 정체성을 찾아서 유학의 부흥을 꾀하려고 하였다. 지역 유림의 결집된 힘으로 제작한 유교 출판물의 책판을 모체로 당대 현실에서 지역 학문의 정체성을 되살려 유학 부흥을 꾀할 거점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근대 전후 시기 제작된 유교 출판물의 책판은 경상남도 밀양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큰 가치를 가진다.

[근대 전후 전국 제일의 출판문화도시 밀양]

현재 밀양시립박물관, 미리벌민속박물관, 개별 문중 등에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간행된 유교 출판물 가운데 79종 6,382장[2010년 조사 결과]이 소장되어 있는데, 주로 1800년대 후반기부터 1900년대 전반기까지 근대 전후 약 100년 동안 제작된 유교 출판물의 책판들이다. 경상남도 밀양은 부산광역시와 울산광역시를 포함한 경상남도 20개 시·군 가운데 가장 많은 유교 출판물의 책판을 보유하고 있고, 전국 다른 시·군과 비교하여도 근대 전후 시기 경상남도 밀양에서 가장 많은 유교 출판물의 책판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별 문중 단위로 문중의 결속을 위하여 간행한 선조 문집 책판만이 아니라, 경상남도 밀양과 인근 지역 사림이 힘을 합쳐 간행한 『점필재집』『이존록』, 『성호문집』과 『성호전집』, 『소눌집』 등 전국적인 수요를 가졌던 거질의 명현 문집 책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미리벌민속박물관 소장 책판과 노상직(盧相稷)자암서당 소장 책판을 더하면, 근대 전후 경상남도 밀양의 유교 출판물은 단순히 한 지역, 한 문중의 이해와 목적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미리벌민속박물관 소장 책판에는 경상남도 밀양의 경제력에 의지하여 제작되었을 경상북도 봉화의 권벌(權橃), 경상북도 영주의 장신(張璶), 경상북도 영천의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 형제 문집의 책판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자암서당 소장 책판에는 노상직의 부친과 선조 문집 책판, 노상직 학문 연원인 경기 지역 남인 학자들 문집과 저작 등의 책판, 서당 교재로 활용한 여러 서적들의 책판, 전통적인 한문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제작한 책판 등 다양한 성격과 용도의 책판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동국씨족고』는 한문 독자들에게 출판 전에 책판 제작 비용을 미리 받는 주문 제작 방식으로 간행하여 보급하였다. 이처럼 근대 전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유학적 전통의 계승과 보존에 크게 기여하는, 석판 인쇄나 활판 인쇄 등 근대적인 출판 인쇄 방식과는 별개로 전통적인 목판 인쇄 방식에 따라 유교 출판물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간행한 독특한 출판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책판이 남아 있는 것 외에도 책판은 남아 있지 않지만 책판으로 인쇄한 목판본 유교 출판물도 적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 전후에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유교 출판물을 목활자와 석판으로도 많이 간행하였고, 또 활판으로도 간행하였다. 실제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여주이씨 문중에서는 이엽산방(二葉山房)이라는 활판 인쇄소와 함께 동문사(同文社)라는 근대적인 출판사를 설립하여 활판 인쇄 방식으로 선조의 문집과 저작을 포함한 여러 유교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이엽산방에서 간행한 고전 소설 『창선감의록』은 전국적인 독자를 가질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이처럼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근대 전후 시기 목판 외에도 목활자, 석판, 연활자 등으로도 많은 유교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따라서 실제 간행된 유교 출판물은 현재 책판이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까지 합하여 본다면 경상남도 밀양은 근대 전후에 활판 인쇄 시설을 갖춘 근대적인 출판사도 있었고, 또 목판 등 전통적인 출판 인쇄 방식을 취하면서도 출판 전에 책판 제작 비용을 미리 받는 주문 제작 방식에 의한 보급도 일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전국 제일의 발달한 출판문화 도시, 전국 제일의 출판 메카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전후 밀양의 주요 유교 출판물과 그 책판]

근대 전후 시기 경상남도 지역 선비들의 집단적 움직임으로서 유교 출판물의 간행은 대체로 책판 제작을 위한 유계회(儒契會)의 결성과 간비(刊費) 조달을 위한 계금(契金)의 조성, 간역소(刊役所) 설치와 책판 제작, 책판 보관을 위한 장판각(藏板閣)과 강당(講堂) 건립, 영정각(影幀閣), 즉 영당(影堂) 건립과 영정(影幀) 봉안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 특히 돋보이는 것은 서책에 대한 수요와 함께, 책판·지역 선비들을 결집할 수 있는 책판의 필요성 때문에 유교 출판물의 간행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서원이 훼철되고 난 뒤의 시대에 도통(道統)의 확인 등 기존의 제향 인물의 권위를 보장하는 장치를 대신할 것으로서의 책판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곳에서 책판 제작에 뒤이어 책판 제작을 가능하게 한 유계회를 그대로 존속시켜, 유계회를 기반으로 책판을 보관할 장판각과 함께 강학이 이루어질 강당을 건립하고 영정각을 건립한 다음 영정을 봉안하여 기존의 서원을 대신할 새로운 형태의 지역 선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조직을 만들어간 것은 경상남도 지역 유교 책판 제작 과정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지역 선비들의 결집된 힘으로 제작한 책판을 모체로 당대 현실에서 지역 학문의 정체성을 되살려 유학 부흥을 꾀할 거점을 마련하려 한 것이 무엇보다 근대 전후 시기 경상남도 지역 유교 책판 제작의 특성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근대 전후 시기 경상남도 지역에서 제작된 유교 책판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큰 가치를 가진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성호집』, 『소눌집』 등의 간행을 추진한 것도 이와 같은 근대 전후 경상남도 지역의 흐름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예림서원 선비들이 서원 사당에 주향한 김종직『점필재집』을 계속 간행하여 그 권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고 또 지역 학문과 문화의 연원으로서 그 의의를 거듭 확인한 것이었다.

1) 지역 전통의 계승과 보존, 『점필재집』[25권 8책]과 『이존록』[2권1책]

예림서원김종직을 주향으로 한 경상남도 밀양의 수서원으로서 선현에 대한 제향과 지역 선비의 교육 등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교육과 교화 등 지역 문풍 진작을 위하여 『점필재집』『이존록』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서책을 간행하였다. 1581년 『근사록』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1649년 『점필재집』『이존록』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1789년 『점필재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1869년 『점필재집』[8권 4책] 산절본을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1870년 『속이존록(續彛尊錄)』을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892년 『점필재집』『이존록』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예림재(禮林齋)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1925년 『밀성박씨향산파대동보(密陽朴氏杏山派大同譜)』를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930년 『사죽당집(思竹堂集)』을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935년 『어변당실기(魚變堂實記)』를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936년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을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1938년 『점필재집』과 『밀주시선(密州詩選)』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중에서 『점필재집』『이존록』의 간행이 압도적인 것은 예림서원 선비들이 지역 사회의 학문과 문화의 연원으로서 계승과 보존에 힘써 왔기 때문이다.

『점필재집』김종직이 서거한 이듬해인 1493년 강백진(康伯珍)과 조위(曺偉)가 편집하였다. 1494년에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하라는 성종(成宗)의 명이 내렸지만 성종의 승하로 간행하지 못하다가, 1497년 정석견(鄭錫堅)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하여 초간한 문집은 없어졌다. 1520년 강중진(康仲珍)이 남아 있던 원고를 모아 선산[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무을면·옥성면·도개면·해평면·산동면·장천면·고아면 지역]에서 다시 간행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 수정 보완 및 교정 산삭을 거치는 과정에 여러 종의 이본이 존재한다.

상하 두 권으로 편집된 『이존록』은 1497년 『점필재집』과 함께 간행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예림서원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다. 주로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에 관한 기록으로서 김종직의 가족사와 집안 내력을 잘 전해 주고 있다. 그중 책판이 남아 있는 것은 1892년 밀양 지역 선비들이 힘을 합쳐 예림서원에서 삼중간(三重刊)한 『점필재집』 책판 200장과 『이존록』 책판 71장이다.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김종직 점필재문집 및 이존록 목판]로 지정되었다. 밀양 예림서원에서 보관하다가 2022년 현재는 밀양시립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하고 있다.

2) 『성호집』 간행과 밀양 지역 선비들의 동향, 『성호문집』[54권 27책]과 『성호전집』[72권 36책]

경상남도 밀양 지역 선비들은 1864년 김해부사로 도임한 허전(許傳)의 문하에 입문하여 새롭게 접한 경기 지역 남인 학자들의 학문을 적극 수용하여 자기화한 끝에 그 연원이 되는 『성호집』의 간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경상남도 진주와 의령 등 서부 경상남도 지역 선비들이 『주자어류전집(朱子語類全集)』, 『성재집(性齋集)』, 『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을 먼저 간행한 것이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처음에는 노상익(盧相益)이 경기 지역 성호 계열 인사들과 교섭하여 추진하였지만, 간역 사업이 시작될 무렵에는 노상익이 중국에 망명해 있어서 노상익의 아우 노상직이 이병희(李炳憙)와 허채(許埰)의 도움을 받아 추진하였다. 그러나 『성호집』 고본(稿本), 즉 문집 초본(文集 草本)이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이병희에게 전달되어 간역소가 차려지면서, 이병희가 주관하는 형태로 추진되어 간행되고 또 보급되었다. 1916년 판각 등 간역에 소요되는 예산이 경상도와 충청도 일원의 개인과 문중의 출연금으로 상당 부분 확보되어, 1917년 1월에 간역을 시작해서 1917년 4월에 간역을 마치고 책판은 간역소가 있었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천연정(天淵亭)[보본당(報本堂)]에 보관하였다.

경상남도 밀양 지역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성호집』의 간행은 경상남도 일원에 널리 퍼져 있었던 허전(許傳)의 제자들이 서부 경상남도 지역에서 추진한 일련의 경기 지역 남인 학자들의 문집과 저작의 간행을 한 지역의 일이 아닌 전국적인 일로 만들어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낸 성사였다. 당시 경상남도 밀양은 학문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 전국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허전의 제자로서 노상익노상직 형제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한림] 금곡리에서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국골을 거쳐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고, 허전과 이종기(李種杞)의 제자로서 허채가 김해에서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로 이주해 있었다. 여기에 허전의 제자로서 대과를 거쳐 동부승지를 지낸 안희원(安禧遠)과 허전의 제자인 부친 이익구(李翊九)에게 학문을 익히고 영남 지역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면서 잠사업과 출판 등 실업에 힘을 쓴 이병희가 있었다.

그러나 『성호집』의 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간행을 둘러싼 지역 내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난항을 겪었다. 그 원인으로 유탁일은 “① 『성호집』 간행을 주도해야 할 안희원이 불참한 것, ② 『성호집』 고본이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전달되고 간역의 주관이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의 여주이씨가 된 것, ③ 당초 발의할 때 전집을 간행하지 않고 긴요한 것을 추린 15책으로 판각하려 한 것” 등 세 가지를 들었다. 안희원이 불참함으로 인하여 안희원의 주도로 36책본 『성호전집』을 간행하는 결과를 낳았고, 『성호집』 고본이 노곡이 아닌 퇴로에 전달되어 간역의 주관이 퇴로리 여주이씨 이병희가 되면서 노상직은 『하려집(下廬集)』 간역을 서두르게 되었으며, 고본대로 간행하지 않고 긴요한 것을 추려서 15책으로 간행하겠다고 발의한 것은 전국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켜 결국에는 이남규(李南珪)의 27책 산절본으로 간행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요컨대 문집과는 다른 전집을 간행하려던 원래의 계획이 시작부터 크게 어긋나면서, 『성호문집』과는 또 다른 『성호집』인 『성호전집』을 안희원의 주도로 간행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었다. 더구나 간역을 이병희가 주관하면서 애초에 간역을 주관하던 노상직이 배제되고, 여기에 간역 초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허채가 소극적인 자세로 임하게 되어 더 이상 힘을 결집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경상남도 밀양 지역 내 갈등으로 결국 『성호문집』 책판을 보관하던 천연정[보본당]이나 『성호전집』 책판을 보관하던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모렴당(慕濂堂)은 장판각과 강당, 그리고 영정각을 함께 건립하여 서원을 대신해 지역 선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병희의 주도로 1917년 간행한 『성호집』은 퇴로본(退老本)이라고 하고, 구별을 위해 『성호문집』이라고 칭한다. 책판은 현존 판수 결락 없이 1,041장이다.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이익 성호문집 목판]로 지정되었다. 2022년 현재 밀양시립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안희원의 주도로 간행한 『성호집』은 모렴당본(慕濂堂本)이라고 하고, 구별을 위해 『성호전집』이라고 칭한다. 1918년 안희원의 주도로 판각이 시작되었지만, 중간에 안희원이 사망하면서 삼년상을 마친 1921년 다시 간역을 시작하여 1922년 간행하였다. 책판은 현존 판수 결락 없이 1,359장이다.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이익 성호전집 목판]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밀양시립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하고 있다.

3) 사문(師門)의 존숭과 동문(同門)의 결속, 『소눌집』[48권 25책]

노상직이 서거한 1931년부터 제자들을 중심으로 유문(遺文)을 정리해서 문집 초고를 만들고, 1933년 3월 자암서당에 간역소를 차리고 간역을 추진하여 1933년 12월에 마쳤다. 간비는 경상남도 일원에 폭넓게 분포하던 노상직의 제자들이 대부분 부담하였다. 책판은 간역소가 있던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 자암서당에 보관하였다. 1932년 노상직의 영정 봉안 논의가 있는 이후 1936년 경상남도 창녕 지역 제자들을 중심으로 창녕군 이방면 석리 문방마을에 강당과 영당을 짓고 노상직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자암서당에는 장판각과 함께 영정각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소눌집』 판수는 결락 없이 1,013장이다. 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노상직 소눌문집 책판외 20종]로 지정되었으며, 2022년 현재 밀양시립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하고 있다.

[밀양의 유교 출판물 보존과 관리, 그 활용 방안]

경상남도 밀양은 1800년대 후반기부터 1900년대 전반기까지 근대 전후 약 100년 동안 전통적인 목판 인쇄 방식에 따라 많은 책판을 제작하여 유교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그 실물 자료로 남아 있는 책판만 70여 종 6,000여 장이다. 이것은 경상남도에서 제일 많은 보유량일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 전국 어디에서도 이보다 많은 양을 보유한 곳이 없다. 이와 함께 목활자나 석판 등으로도 다수 유교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경상남도 밀양은 유교 출판물의 간행에 있어서 근대 전후 약 100년 동안 전국 제일의 출판문화 도시, 전국 제일의 출판 메카였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유교 출판물과 책판은 지역의 경제적 풍요에 힘입어 고조된 문화적 욕구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래도록 침체되었던 지역 학문의 정체성을 찾아서 유학의 부흥을 꾀하려고 한 결과물이다. 지역 유림의 결집된 힘으로 제작한 유교 출판물의 책판을 모체로 당대 현실에서 지역 학문의 정체성을 되살려 유학의 부흥을 꾀할 거점을 마련하려는 욕구에서 이루어낸 결과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800년대 후반기부터 1900년대 전반기까지 제작된 유교 출판물과 책판은 경상남도 밀양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큰 가치를 가진다.

책판은 지금 밀양시립박물관에서 보관과 전시를 겸한 수장고를 갖추어 잘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책판만이 아니라 책판을 통해 간행된 유교 출판물, 그리고 책판이 아닌 목활자·석판·활판 등으로 간행한 유교 출판물은 아직 그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 장기적인 보존과 관리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러한 자료들을 교육과 홍보 자료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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