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공립보통학교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57
한자 密陽公立普通學校 -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삼문동 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경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7년 11월 - 사립 개창학교 설립
소재지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삼문동 3]지도보기
성격 공립학교 터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에 있는 공립학교 터.

[개설]

1897년 문산(聞山) 손정현(孫貞鉉)은 국권을 회복하고 자주독립을 이룩하는 길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임을 통감하여 사립 개창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창학교는 1901년 공립으로 인가되어 공립 개창학교로 되었다가 1906년 교육령에 의하여 밀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는 1912년 9월 지역 농업 발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밀양공립간이농업학교를 부설하였으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학교 위치를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밀양시 삼문동으로 이전하였다.

[변천]

1920년 남학생의 수업 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고 밀양공립간이농업학교를 폐지하였다. 1920년 2층 목조 교사를 준공하여 8학급을 편성하고, 1924년 5월 속수학교를 부설하였으며, 1926년 4월 18학급을 편성하고 속수학교를 폐지하였다.1927년 4월부터 여학생의 수업 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였고, 1936년 강당을 준공하였으며, 1938년 4월 밀양제일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다. 1946년 5월 교명을 밀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하고, 급증하는 취학 아동을 위하여 1961년 18개 교실을 증축하였으며, 그 뒤 밀양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1911년부터 2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점차 학생 수가 증가하여 1945년 3월 24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모두 4,043명을 배출하여 경상남도 밀양 지역의 교육을 선도하였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춘계 운동회, 학예회 등을 개최하였는데, 단순한 학교 행사이기도 하였지만 지역 주민 400~1,500여 명이 참여하는 지역의 문화 축제로서의 성격도 띠었다. 이러한 점에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경상남도 밀양 교육의 요람이면서 신문화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학생은 서당에서 1~2년 정도 공부한 여유 있는 환경의 10~11세의 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주로 검은 한복을 입고 검은 고무신을 신었고 여학생은 치마 저고리에 머리를 땋았다. 교원은 주로 일본인이었고 조선인 선생은 5~6명 정도였다. 졸업 후에는 도시의 우수한 상급 학교로 많이 진학하였는데, 졸업생의 진학률은 계속 증가하여 1923년 경에는 80%의 졸업생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였고 나머지는 취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상급 학교로는 특히 밀양농잠학교에 가장 많은 인원이 지원하였는데, 따라서 경상남도 밀양 교육의 많은 부분은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밀양농잠학교가 차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위치]

밀양공립보통학교 터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3에 있다.

[현황]

밀양공립보통학교 터에는 현재 밀양초등학교가 있다.

[의의와 평가]

밀양공립보통학교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지역 민족 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독립운동 인사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3월 13일 3·13 만세운동 당시 보통학교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에 수백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동참하였다. 또한 1922년 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기 위한 동맹 휴업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행동은 일제의 무단적 폭압 통치 아래에서도 밀양공립보통학교가 민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견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19세기 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손정현이 설립하였던 사립 개창학교의 설립 취지, 즉 민족 의식을 함양하여 독립의 기초를 다지겠다는 목적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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