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44
한자 黃尙奎
영어공식명칭 Hwang Sang 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약산로 41[내이동 957]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4월 19일연표보기 - 황상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6년 - 황상규 진성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황상규 풍기광복단 단원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황상규 대한광복회 발기인으로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황상규 일합사 조직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황상규 의열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황상규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황상규 의열단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으로 징역 7년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황상규 잡지 『신생활사』 창간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황상규 신간회 밀양지회 설립
몰년 시기/일시 1931년 9월 2일연표보기 - 황상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황상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957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학교|수학지 진성학교 -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향교3길 19[교동 733]지도보기
묘소 용지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북로군정서|의열단|신간회 중앙간부|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위원|조선어학회 간부|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신간회 밀양지회 지회장|밀양협동조합 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황상규(黃尙奎)의 본관은 창원(昌原), 아호는 백민(白民)이다. 별명이 관운장(關雲長)이었으며, 만주에서는 허택(許鐸)·허옥(許鈺)이라는 가명도 썼다. 황상규는 아버지 황문옥(黃文玉)과 어머니 허경순(許敬順)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의열단(義烈團) 단장이었던 김원봉(金元鳳)의 고모부이다. 1891년 4월 19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황상규는 1906년 밀양향교 내에 설립된 진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찍부터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황상규는 밀양 고명학교(高明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젊은 학도들에게 독립과 애국 정신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전홍표(全鴻杓)가 경영하던 동화학원을 인수하여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항일 운동 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5년 풍기광복회와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일부 인사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6년에는 밀양에서 김대지(金大池), 구영필(具榮佖) 등과 함께 일합사(一合社)라는 친목 단체를 조직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의 의기를 집결시켰다.

1918년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건너간 황상규는 1919년 조소앙(趙素昻),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후 북로군정서로 통합]에서 활동하였는데, 재무 총책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의 39명 서명자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지린성에서 김원봉 등과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대 초 의열단은 총기·폭탄 등을 국내로 반입하여 일본 고관과 중요 관공서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곽재기(郭在驥)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0년 6월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된 황상규는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만기 출옥한 황상규는 이후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전념하였다. 잡지 『신생활사(新生活社)』 창간에 참여하였고, 신간회(新幹會) 중앙 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밀양 지역 사회 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27년 10월 밀양청년회 집행위원장, 12월 신간회 밀양지회 지회장, 1928년 밀양협동조합 위원 등에 선임하였다. 이 외에도 경상남도 밀양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는 등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황상규는 1931년 9월 2일 사망하였다.

[묘소]

황상규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용지리 선영에 있다.

[상훈과 추모]

황상규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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