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48
한자 金海 金氏
영어공식명칭 Kim Hae Kimssi|Kim Hae Kim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태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김해 - 경상남도 김해시
성씨 시조 김수로

[정의]

김수로를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거 성씨.

[연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연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蜂)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한 군장(君長)을 얻기 위하여 하늘을 향하여 의식(儀式)을 올리자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하니,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古都)로서 지명도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린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하고 김천축(金天竺)[고대 인도의 행정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 여인을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동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中始祖)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 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자이며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해김씨의 세계(世系)를 이루었다. 김해김씨는 중시조 김유신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 개 파로 분파(分派)되었으며 그중에서 유신의 직계 종파는 고려 때의 김목경(金牧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경파(京派)와 김목경의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일세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일세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입향 경위]

밀양에는 시조 김수로왕 25세손으로 고려 광종 때 벼슬한 김진유(金振酉)의 후손이 여러 곳에 집거한다.

김상주(金相宙)의 장남 계열로 고려 충혜왕 때인 1342년(충혜왕 3) 조적(曺頔)의 반란을 진압한 김목경의 장남 김보(金普)의 후손으로 안경공파(安敬公派) 파조 김영정(金永貞)의 증손자인 김희철(金希哲)이 있다. 선조의 장인 김희철의 5세손 김광채(金光彩)는 32세 때 흉적의 화를 만나 경기도 죽산에서 창녕 계성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손자 김석현(金錫鉉)은 아들 다섯 형제를 데리고 무안 마흘리 어은동으로 이거하였다. 여기에 재숙소 산양재(山陽齋)가 있다. 또 김영정의 9세손 김달조(金達祚)가 숙종 때 사화를 피하여 시천한 산내 남명리 동명[숲마]에 동림재(東林齋)가 있다.

아울러 김보의 3남 김창문(金昌門)은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파조이다. 김창문의 7세손 김희덕(金希德)이 임진왜란 때 경기도 양주에서 남하하여 정착한 초동 범평리에 유산재(酉山齋)가 있다.

김목경의 차남 김저(金著)의 7세손 김귀존(金貴存)이 1467년(세조13) 관직을 고사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상동 매화리 안매화로 이거하였다. 고손자 김인서(金麟瑞)는 무과 급제를 하였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곽재우 휘하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경무재(景武齋)가 있다.

김상주의 차남 계열로 삼현파 파조 김관의 고손자 김극일(金克一)은 출천(出天)의 효행으로 ‘절효(節孝)’를 사시(私諡)받았고, 아들 여섯은 각자 파조가 되었다.

집의공파(執義公派) 중 김대유의 고손자 김기련(金基璉)이 청도군 토평동에서 청도면 소태리 웃마[모선재마을]로 시천하여 모선재(慕先齋)·모선재 중수기적비가 세워졌다. 김대축의 손자 김치우(金致遇)는 명종 때 청도에서 부북 춘화리 화산으로 이거하였다. 또 무안 가례리 다례동 못안마을은 김일손(金馹孫)의 7세손 김원장(金元章)이 청도군 백곡에서 전거한 곳으로 모계재(慕溪齋)가 있고, 김원장의 5세손 김만곤(金萬坤)의 효자비가 가례리 초입에 있다. 김즙(金濈)의 증손자 김박(金墣)이 영조 때 이거한 부북 위양리 도방동삼모재(三慕齋)가 있다.

녹사공파(錄士公派) 중 김류손의 차남 김대승(金大昇)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이후 청도에서 무안 성덕리 부연(釜淵)에 입촌하였고, 후손들이 성덕리 강동 서은마을[서근덤]과 고라리에도 산다. 또 4남 김대용(金大鏞)의 8세손 누곡(耨谷) 김필영(金弼永)은 영조 때 창녕 영산에서 전거한 무안 양효리 곡량으로 이사하였으며, 병산재(屛山齋)가 있다. 이 외 김극일의 8세손 김원(金源)이 선조 때 청도 내동[현 청도군 매전면 내리]에서 이거한 하남 명례리 평지동완산재(玩山齋)가 있다.

서강공파(西岡公派) 파조 김계금(金係錦)의 10세손 김진흥(金振興)이 영조 때 김해에서 이사한 하남 파서리 내동에 파산재(巴山齋)가 있다. 또 파조의 12세손 김인조(金仁祚)는 철종 때 김해 한림면 퇴래리 퇴은에서 하남 귀명리로 이주하였고 귀서 뒷산에 학명재(學明齋)가 있다.

참봉공파(参奉公派) 파조 김인서의 손자 김일준(金逸駿)은 동생 김일원(金逸騵)과 함께 명종 때 김해 생림면 봉림을 떠나 처향인 부북 적항리[현 청운리 상촌]에 처음 터를 잡았으나, 김일원은 만년에 밀양에서 개령 마전[현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로 이주하였다. 손자 김련부(金連富)는 임진왜란 때 김천성에서 순절하였고, 증손 김천(金天)은 정유재란 때 곽재우 휘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사적으로 부북 청운리 상촌에 김일원·김세해 부자를 비롯한 선대 제단과 경모재(景慕齋)가, 덕곡리 새터에 재숙소 운곡재(雲谷齋)·김일준 묘갈·김일준 묘비·김인서 김헌 부자 설단이 있다.

이 밖에 영조 때 청도군 화양읍 토평에서 옮겨 온 김선옥(金善玉)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상동 도곡리 하도곡학선정(學仙亭)이, 또 인산 김해조[1708~1771]의 증손 김중준(金仲俊)이 청도 매전에서 입촌한 상동 신곡리 오곡[음지]에 인산재(仁山齋)가 있다. 또 헌종 때 김광진(金光振)이 무안 고라리에 입촌하였다.

현대 인물로는 경파 25세손이자 참판공파(參判公派) 19세손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항일 지사 김대지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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