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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68
한자 南楊州光陵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부평리 산99-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17년 - 세조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18년 11월 11일 - 정희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68년 - 세조 사망
조성 시기/일시 1468년연표보기 - 남양주 광릉 조성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83년 3월 30일 - 정희왕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 26일연표보기 - 남양주 광릉 사적 제19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양주 광릉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남양주 광릉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부평리 산99-2]지도보기
성격
양식 동원이강형
관련 인물 세조|정희왕후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조선 세조정희왕후의 능.

[개설]

남양주 광릉(南楊州光陵)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1417~14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파평 윤씨(坡平 尹氏)[1418~1483]의 능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남양주 광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남양주 광릉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번지에 있다.

[변천]

남양주 광릉은 1468년 세조가 사망하자 풍양현(豐壤縣) 직동(直洞)[현 진접읍 부평리]에 안장하여 ‘광릉’이라고 하였으며, 정희왕후는 1483년 사망하여 세조 광릉 동쪽에 안장되었다.

[형태]

남양주 광릉은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서쪽 언덕에 세조가 안장되고, 동쪽 언덕에 정희왕후가 안장된 동원이강형(同原異岡形)이며, 동원이강형 능제의 시초이다. 세조는 왕릉에 사대석(莎臺石)[호석(護石), 병풍석(屛風石)] 설치를 금지하였으며, 후대 왕릉 조성의 전범(典範)이 되기도 하였다.

남양주 광릉은 각기 단릉이며, 봉분에는 병풍석 없이 12면의 난간을 둘렀다. 난간석 뒤쪽으로 석양(石羊), 석호(石虎) 2쌍씩 배치하였으며, 곡장(曲墻)으로 감싸고 있다. 봉분 앞쪽으로는 망주석 1쌍,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이 건립되어 있다. 능강 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 사진에서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水刺間)의 모습이 확인되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비각 안에 있는 표석은 1754년 건립된 것으로 홍봉한(洪鳳漢)[1713~1778]이 앞면의 글씨를 쓰고, 홍계희(洪啓禧)[1703~1771]가 뒷면의 글씨를 썼다. 능역 입구에는 2개의 연지(蓮池)가 있으며, 서쪽 연지는 재실(齋室) 곁에 있다. 재실은 일부 건물이 멸실되었다. 『춘관통고』에서는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안향청(安香廳), 재실이 있었다고 하였다. 금천교 앞에는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건립되어 있다.

남양주 광릉은 병풍석 대신 난간석만 설치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난간의 동자주(童子柱)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오랜 시간 풍화되어 형태가 뚜렷하지 않지만 문관(文官) 복장이며,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데 관 위에 십이지의 동물이 작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일부에서 확인된다. 고려 공민왕릉 이래로 왕릉 병풍석에 문관 복장의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태조 건원릉, 태종 헌릉까지 계승되었다. 1452년 문종 현릉 병풍석의 십이지신상의 관에 동물 머리를 조각하기 시작하였는데 남양주 광릉도 계승하고 있다. 세조 능의 장명등은 지붕돌 내부 중앙 위아래로 환기구가 뚫려 있으며, 정자석(頂子石)을 세워 놓았는데 『세종실록』「오례의」 내용을 정확히 구현한 것이다. 현재 조선 왕릉 장명등 중 환기구가 있는 것은 덕종 경릉, 세조 광릉, 성종 선릉뿐이다. 정희왕후 능의 장명등은 환기구 상단이 막혀 있어 환기구 형태 변화를 살필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광릉은 병풍석과 신도비를 설치하지 않아 조선 왕릉 중 검소함의 상징이었다. 또 최초의 동원이강형 능제로 석물과 정자각의 설치 등 광릉의 능제를 준용(遵用)하는 경우가 많아 조선 왕릉 제도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 난간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며, 장명등의 환기구 등은 왕릉 석물 변천을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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