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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540
한자 世祖
영어공식명칭 Sejo
이칭/별칭 이유(李瑈),수지(粹之),진평대군(晉平大君),함평대군(咸平大君),진양대군(晉陽大君),수양대군(首陽大君),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부평리 246-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신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 세조 출생
혼인 시기/일시 1428년 - 세조 윤번의 딸 파평 윤씨와 혼인
활동 시기/일시 1428년 - 세조 진평대군에 봉해짐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세조 함평대군으로 개봉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세조 진양대군으로 개봉
활동 시기/일시 1445년 - 세조 수양대군으로 개봉
활동 시기/일시 1453년 10월 10일 - 세조 계유정난을 일으킴
활동 시기/일시 1453년 10월 - 세조 동생 안평대군에게 사약을 내림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세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
활동 시기/일시 1456년 - 세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 참살
활동 시기/일시 1456년 - 세조 집현전 폐지
활동 시기/일시 1458년 - 세조 호패법 재시행
몰년 시기/일시 1468년연표보기 - 세조 사망
묘소|단소 광릉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부평리 246-4]지도보기
성격
성별 남성
본관 전주(全州)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능이 있는 조선 시대 제7대 왕.

[가계]

세조(世祖) 이유(李瑈)[1417~1468]의 증조할아버지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이고, 할아버지는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며, 할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여흥 민씨(驪興 閔氏)이다. 아버지는 세종(世宗) 이도(李裪)이고,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 심씨(靑松 沈氏)이다. 부인은 정희왕후(貞熹王后) 파평 윤씨(坡平 尹氏)이다.

세조정희왕후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은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이고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청주 한씨(淸州 韓氏)[후일 소혜왕후, 인수대비]와 혼인하였다. 둘째 아들 예종(睿宗)은 한명회(韓明澮)의 딸 장순왕후(章順王后), 한백륜(韓伯倫)의 딸 안순왕후(安順王后)와 혼인하였다.

후궁 근빈 박씨(謹嬪 朴氏)와의 사이에서 2남을 낳았는데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와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이다. 후궁 소용 박씨(昭容 朴氏)가 아들 아지(阿只)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계보에 없는 후궁으로 신숙주(申叔舟)의 딸 숙원 신씨(淑媛 申氏)가 있다.

[활동 사항]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출생하였다. 이름은 유(瑈)이고, 자는 수지(粹之), 생전의 존호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이다. 1428년(세종 10)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진 뒤 1428년 윤번(尹璠)의 딸 파평 윤씨[후일 정희왕후]와 혼인하였다. 1433년(세종 15)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가, 1433년 7월 다시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개봉되었는데,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또 다시 개봉되었다.

수양대군은 바로 밑의 동생이었던 안평대군과 함께 집현전 관원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정인지(鄭麟趾)가 『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을 맡았을 때 동생 안평대군과 함께 감독하였다. 1446년(세종 28)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났고, 1450년(세종 32)에는 아버지 세종이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에 이어 즉위한 큰형 문종이 재위 2년 만인 1452년(문종 2)에 죽자 조카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한명회 등과 함께 왕위 찬탈을 도모하던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권람, 한명회 등과 함께 김종서 등 단종 보위 세력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종친으로서 영의정이 되어 군국대사를 모두 처리하였다. 1453년 10월 세조는 동생 안평대군 또한 역모로 몰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낸 뒤 일주일 만에 사약을 내렸다.

1455년(단종 3)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관원 출신이었던 성삼문, 박팽년 등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이 김질의 밀고에 의해 실패하자, 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을 모두 처형하고 이후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1456년 왕권을 강화하고자 아버지 세종이 세웠던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지하였으며 사간원의 간원 4인을 감원함으로써 언론을 억압하였다. 이와 함께 세조는 할아버지 태종이 시행했던 6조 직계제를 다시금 시행하였고, 1458년(세조 4) 중단되었던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고 지방 통치를 위하여 유서(諭書) 정치를 추진하는 등 중앙 집권과 왕권 강화책을 추진하면서 아버지 세종이 이룩하였던 유교적 이상 정치의 모습을 후퇴시켰다.

세조는 즉위한 지 13년 만인 1468년(세조 14)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1468년 9월 17일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정창손, 밀성군 이침, 영순군 이부, 귀성군 이준 등이 능지(陵地)로 정할 곳을 의논한 뒤 다음 날인 1468년 9월 18일 밀성군 이침, 영순군 이부, 귀성군 이준 등이 풍양[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의 땅을 살피고 돌아와 동래 정씨 정흠지(鄭欽之)의 묘가 있는 산이 좋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신숙주 등이 상지관(相地官)을 데리고 가서 직접 보고 온 뒤 능을 조성하기 좋다고 보고하였다. 결국 예종이 직접 대신들과 거동하여 정흠지의 묘가 있는 남양주의 산을 둘러보고 능지로 결정하여 광릉(光陵)을 조성하게 되었다. 정흠지 등의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정흠지는 사육신을 밀고한 김질의 처조부였다.

한편, 남양주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세조가 건립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저술 및 작품]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을 편찬하였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정비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시작하였으며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대장경(大藏經)』 등을 인쇄하였다.

[묘소]

세조의 능은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6-4에 조성된 광릉(光陵)이다. 광릉은 ‘남양주 광릉’이라는 명칭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약칭 혜장대왕(惠莊大王)]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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