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604
한자 金元行
영어공식명칭 Kim Wonhaeng
이칭/별칭 백춘(伯春),미호(美湖),운루(雲樓),문경(文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채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2년 12월 29일연표보기 - 김원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19년 - 김원행 진사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761년 - 김원행 통정대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72년연표보기 - 김원행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05년 - 김원행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음
부임|활동지 석실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안동(安東)

[정의]

경기도 남양주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후기의 학자.

[가계]

김원행(金元行)[1702~177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고,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다. 아버지는 우부승지 김제겸(金濟謙)이고, 어머니는 송병원(宋炳遠)의 딸 은진 송씨(恩津 宋氏)이다. 종숙인 김숭겸(金崇謙)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부인은 홍구조(洪龜祚)의 딸 남양 홍씨(南陽 洪氏)이며, 아들은 김이안(金履安)·김이직(金履直)이다.

[활동 사항]

김원행은 1702년(숙종 28) 12월 29일 태어났다. 17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721년(경종 1) 할아버지 김창집과 아버지 김제겸이 각각 거제와 울산으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1725년(영조 1)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면서 김창집과 김제겸의 관작이 회복되었지만, 김원행은 과거 응시를 단념하고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김원행은 1750년 익위사위솔·종부시주부, 1751년 사헌부지평 등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고 남양주에 있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강학하며 낙론(洛論)[조선 후기에, 기호학파(畿湖學派) 가운데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학파]의 종장(宗匠)으로서 활동하였다. 1761년 홍봉한(洪鳳漢)의 건의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이후 공조참의와 성균관좨주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김원행은 1772년 7월 7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원행의 저술로는 문집인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원행은 사망한 뒤 석실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805년(순조 5)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