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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990
한자 石室書院址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한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54년연표보기 - 석실서원 건립
폐지 시기/일시 1868년 - 석실서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소재지 석실서원 표석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석실서원지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지도보기
성격 서원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있었던 조선 후기 석실서원의 터.

[개설]

석실서원지(石室書院址)는 1654년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에 건립된 석실서원의 터이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현재는 훼철되어 터만 남아 있다.

[변천]

17세기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김상용(金尙容)[1561~1637], 김상헌(金尙憲)[1570~1652] 형제가 척화의 의리를 표방하였고 김상헌이 1652년(효종 3) 83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경기도 양주[현 남양주]에서 서원 건립 논의가 시작되었다. 1654년(효종 5) 서원을 짓는 공역이 수석동에서 시작되었고 묘우와 재실을 완성하여 김상헌김상용을 제향하였다. 이후 강당과 원생들이 거처하는 동재, 서재 건물을 하나씩 건축하여 서원의 체제를 갖추었다. 1663년(현종 4) ‘석실(石室)’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숙종 대에 경기도 유생 이세위가 상소하여, 석실서원김수항(金壽恒)[1629~1689], 민정중(閔鼎重)[1628~1692], 이단상(李端相)[1628~1669] 3명이 추배되었다. 모두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석실서원김상헌에서 송시열(宋時烈)[1607~1689]로 이어지는 노론계 의리를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우(祠宇) 역할을 하였다. 석실서원은 서울과 가까웠으며 풍광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또한 강학(講學)을 위하여 유력 인사들과 자제들이 모여들었다. 석실서원은 정조 대 시파(時派) 인물들을 비롯한 경화벌열(京華閥閱) 자제들이 교육받았던 곳이며, 특히 홍대용(洪大容)[1731~1783] 등 북학파(北學派) 인물들이 학문을 전수받은 장소였다. 석실서원이 학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김창협(金昌協)[1651~1708]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김창협석실서원에서 의욕적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석실서원이 경기 지역에서 강학과 문사 교류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수려한 풍경뿐 아니라 교통상의 이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한강 수로를 따라 서울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교통상의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석실서원 역시 다른 서원과 다르지 않게 유가의 기본적인 경서를 학습하는 과정을 두었다. 강규(講規)에 의하면 먼저 『소학(小學)』을 공부하고 이어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이후에 여러 경을 마치고 다시 돌아 반복하였다. 이러한 과목들을 공부하면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은 제자들에게 특히 강학을 중시하였다. 경전 가운데에서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중용(中庸)』을 마지막 공부로 생각할 만큼 매우 중시하였다. 김원행석실서원에서 제자들과 강학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낙론 성리학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노론 의리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철종 대에는 안동 김씨(安東 金氏)의 세도가 극성기를 맞이하여 석실서원에서도 안동 김씨와 관련한 연이은 추배가 이루어졌다. 1853년(철종 4) 유생 김칠환(金七煥) 등이 상소하여 1857년(철종 8) 김창흡(金昌翕)[1653~1722]·김원행·김이안(金履安)[1722~1791]을 추배해야 한다는 건의로 김창협 등의 제향이 실현되었다. 1857년 김창집(金昌集)[1648~1722]·김조순(金祖淳)[1765~1832]도 연이어 석실서원 제향의 반열에 올랐다. 이로써 서원 제향 인물 11명 중 안동 김씨는 9명을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점차 안동 김씨 가문 가묘(家廟)의 성격을 띠어 갔다. 다른 서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현상으로 조선의 중앙 정부 입장에서 면세와 면천이라는 재정상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고 석실서원 역시 훼철되었으며, 위패를 매장하고 서원 건물을 철거하였다.

[위치]

석실서원의 원래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이며, 서원이 철폐된 이후 석실서원 표석 등을 후손 가문의 공터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로 옮겼다.

[현황]

석실서원이 훼철된 이후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석실서원의 흔적이 옮겨진 덕소리 일대에는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송시열의 필체가 남아 있는 취석비(醉石碑), 그 외에 도산석실려비·고송오류문, 원래 집터에 있었던 송백당유허비 등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서울과 경기의 노론 학풍을 이끌었던 공간이다. 석실서원지김창협, 김원행, 홍대용 등과 그들의 학문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로 학계에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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