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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1398
한자 洪淳馨
영어공식명칭 Hong Sunhyeong
이칭/별칭 여문(汝聞)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채홍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8년연표보기 - 홍순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74년 - 홍순형 증광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75년 - 홍순형 규장각대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79년 - 홍순형 여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홍순형 개성부유수로 영전
활동 시기/일시 1887년 - 홍순형 성균관대사성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88년 - 홍순형 사헌부대사헌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0년 - 홍순형 한성부판윤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1년 - 홍순형 예조판서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홍순형 왕태후궁대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904년 - 홍순형 의정부찬정 제수
몰년 시기/일시 1934년연표보기 - 홍순형 사망
묘소|단소 홍순형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42-14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남양(南陽)
대표 관직|경력 중추원찬정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에 묘소가 있는 개항기 문신.

[가계]

홍순형(洪淳馨)[1858~1934]의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여문(汝聞)이다. 할아버지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 金氏)이다. 아내는 대구 서씨(大丘 徐氏)·청주 한씨(淸州 韓氏)이다.

[활동 사항]

홍순형은 1858년(철종 9)에 태어났다.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 5위로 급제한 이후, 1875년 규장각대교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1877년까지 사헌부장령·홍문관부응교·승정원동부승지 등 다수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리던 민영익(閔泳翊)의 문하에 자주 드나든 김옥균(金玉均)·김흥균(金興均)·심상훈(沈相薰)·어윤중(魚允中)·이중칠(李重七)·조동희(趙同熙)·홍영식(洪英植) 등 총 8명의 인물을 세간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불렀는데, 홍순형 또한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1879년 여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영릉(寧陵)의 보토당상(補土堂上) 직책을 맡아 가자(加資)를 받았으며 1882년 개성부유수로 영전하였다. 1886년 이조참판과 홍문관부제학 자리를 거쳤으며 1887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는데, 1887년 과거 갑신정변 당시의 일에 대한 사후 처리 과정에서 죄인들의 진술 가운데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김낙진(金洛鎭)·이재원(李載元)·이재완(李載完)·심상훈 등과 함께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888년 사헌부대사헌과 규장각직제학에 차례로 임명되는 등 관직 생활을 이어 갔다. 1889년 예조참판으로 왕대비전(王大妃殿) 옥책문(玉冊文) 제술관(製述官)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1890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는 동시에 특별히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한 달 뒤에는 형조판서를 제수받았고, 1891년 다시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가 1891년 말 예조판서 자리에 올랐다. 1893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어 1893년 황주(黃州)에서 발생한 황주민란(黃州民亂)의 주도자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상대로 학정을 벌인 지방관과 향리 등을 모두 엄벌하는 데 주력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에 관제 개편 과정에서 신설된 왕태후궁대부(王太后宮大夫)에 임용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되었다. 1898년부터 1899년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을 겸임하였고, 1901년 판돈녕원사에 임용되고 칙임관 2등에 서임되었으며 명헌태후궁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겸임하였다. 1902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표훈원부총재(表勳院副總裁)에 임용되었으며 1903년까지 태의원경(太醫院卿)을 겸임하였다. 1904년 의정부찬정에 임용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는 동시에 표훈원부총재를 겸임하였다. 그 이후로도 판돈녕원사·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중추원찬정(中樞院贊政) 등 다양한 중앙 관직을 역임 또는 겸임하였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조선귀족령에 따라 남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나, 홍순형은 이를 받지 않고 반납하였다. 이후 1926년 순종의 국장(國葬) 당시 산릉주감제거(山陵主監提擧)로 활동한 것을 마지막으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월문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로 낙향한 뒤, 본인 소유 토지에 시무의숙(時務義塾)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하였다. 『남양주시지』에 따르면 낙향한 뒤 와부면 월문리에 큰 정자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그 자리에는 목장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1934년 사망하였다.

[묘소]

홍순형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42-14에 증조할아버지 홍기섭(洪耆燮)·할아버지 홍재룡·아버지 홍종석 등의 묘소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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