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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11
한자 寒旅學派
영어공식명칭 Han-yeo school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정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7년 - 정구가 안동부사를 지내며 낙동강 상류로 영향력 확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2년 - 정구가 거처를 칠곡으로 옮기며 영향력의 범위 확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7년 - 정구가 동래 온정(溫井)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낙동강 하류 지역까지 영향력 확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0년 - 정구의 행장을 장현광이 지음
관련 지역 회연서원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신정리 258]지도보기

[정의]

17세기 초반 낙동강 중류를 지역적 기반으로, 정구가 형성한 한강학파에서 시작되어 장현광의 여헌학파로 이어졌던 학문적 흐름의 통칭.

[개설]

조선 시대 영남 유학이라 하면 흔히 안동을 중심으로 한 ‘좌도(左道)’ 혹은 ‘낙상(洛上)’[낙동강 상류]의 퇴계학파와 진주를 중심으로 한 ‘우도(右道)’ 혹은 ‘낙하’(洛下)[낙동강 하류]의 남명학파를 떠올린다. 16세기 중엽 동시대에 이황(李滉)[1501~1570]과 조식(曺植)[1501~1572]이 출현하면서 영남 유학과 조선 유학 자체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기에 이런 이해는 설득력을 지닌다. 문제는 이렇게만 보면 그 중간 지역인 낙동강 중류 지역이 양 지역의 단순한 변방이나 절충으로만 생각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와 다르다.

사림파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로부터 시작해서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1389~1456],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로 이어진다. 그런데 정몽주로부터 김굉필까지가 모두 낙동강 중류 지역 출신이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사림의 온상이었다. 계속해서 조선 중엽에는 정구(鄭逑)[1543~1620]와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라는 탁월한 학자가 출현했으며, 조선 말에 이르러서는 당대 ‘최대, 최고’의 면모를 지닌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한주학파(寒洲學派)’가 출현했다. 낙동강 중류의 학문적 경향성은 퇴계학이나 남명학 이전에 존재했고, 두 학파 어느 쪽에 귀속시키기 곤란한 독자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이 2000년 대 초반부터 학자들이 이 지역에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이런 시각에서 한려학(寒旅學)이라는 학문적 개념이 등장했다.

‘한려학’은 기존의 통념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기존에는 정구를 퇴계학의 적통으로 보았다. 하지만 한려학이라는 관점에서 정구를 재해석하게 되면서 퇴계학 이후 한국 유학의 발전이라는 국면이 비로소 시야에 포착되었다. 한국 유학은 단순히 퇴계학의 지속적 재해석만은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관점은 기존 한국 유학을 ‘퇴율학(退栗學)’ 즉 퇴계학과 율곡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던 것도 재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려학’이라는 개념은 한국 유학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문제점도 지니고 있다. 이는 주로 한려학의 정체성 문제, 혹은 정구와 장현광의 학문적 관계라는 사항을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려학’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현재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공존한다.

첫째 관점은 한려학을 하나의 학파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정구의 ‘한강학파(寒岡學派)’, 장현광의 ‘여헌학파(旅軒學派)’를 통칭하는 용어로서 ‘한려학파(寒旅學派)’라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하나의 통합된 개념으로서의 ‘한려학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 관점 역시 양 학파가 겹치는 지역이 넓고, 문인이 서로 겹친다는 점을 인정한다. 또 지지(地誌) 편찬 등 경세론의 일부 영역에서 한강학파에서 여헌학파로의 계승 의식이 뚜렷하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겹치는 영역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본다.

둘째 관점은 한강학과 여헌학 사이에, 혹은 정구와 장현광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그런 차이점을 뛰어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관점은 한려학을 하나의 학파로 인정한다. 이 관점은 정구와 장현광이 조식이나 특히 이황 같은 선배 학자들의 업적을 통합한 위에 자기 성찰을 더함으로써 어떤 학문 내지 학문 정신을 추구했고, 그것이 공통점을 가졌다고 본다. 그 공통점을 요약하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입지(立志) 의식이 매우 높았다. 둘째, 성인이 자기 임무의 대상으로 삼는 우주 또는 세계를 이들 역시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셋째, 그 결과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통합학을 건설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그와 같은 학문으로 함양된 개인들은 성인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명체적용(明體適用)’을 인격적 성취의 목표로 삼았다.

한강학과 여헌학은 퇴계학을 계승한다는 기본 입장을 공유하며 이러한 전제에서 둘의 연속성은 ‘명체적용지학(明體適用之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선현으로부터 물려받은 도학(道學)을 구체적 현실에 적절히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명체적용의 관점은 우주간의 다양한 일들에 대한 관심을 갖는 박달지학(博達之學)의 학문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런 공통점 안에 차이가 존재했다. 한강학은 그 명체적용지학이 심학(心學)과 예학(禮學)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여헌학은 정구의 심학과 예학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장현광이 지향한 명체적용지학의 중심에는 역학(易學)과 이기론(理氣論)이 존재한다. 특히 장현광은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이황의 학설에 대한 계승과 비판을 함께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장현광 자신의 독창적인 성리학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려학파의 분포와 규모를 살펴보면, 한려학파는 인동~성주에 이르는 낙동강 중류 지역을 아우른다. 한강 문인은 342명이고 여헌 문인은 355명으로 모두 697명에 달한다. 여기서 양문을 출입한 64명을 빼면 문인록을 통해 확인되는 한려학파의 총원은 633명이다. 바로 이들이 이황과 조식 이래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 융합시키면서 17세기 초반의 영남학계를 이끈 실체들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의 상당수가 ‘낙동강 중류’에 해당하는 성주·인동·함안·영산에 포진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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