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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96
한자 宋祐善
영어공식명칭 Song Useon
이칭/별칭 자수(子受),세한재(歲寒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 2월 5일연표보기 - 송우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2일 - 송우선 성주읍 장날 독립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2년 5월 2일연표보기 - 송우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송우선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우선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송우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9[고산리 534]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송우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1길 19[고산리 534]
학교|수학지 송우선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지도보기
활동지 송우선 활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자수(子受), 호는 세한재(歲寒齋). 충숙공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의 15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춘익(宋春翼)이다. 송규선(宋圭善)은 형이다.

[활동 사항]

송우선(宋祐善)[1894~1942]은 1894년 2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34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족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獨立請願運動)을 주도했던 송준필을 후원하였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야성 송씨 종실(冶城宋氏宗室) 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성주 유림의 종장 송준필의 문하생과 유력한 성주 유림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회근(宋會根)·김희규(金熙奎)·이봉희(李鳳熙)·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 등이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 청원서의 서명 운동을 벌였다. 송우선송준필송규선과 협의하여 각처의 유림을 방문하며 독립 청원서의 서명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성주 백세각에서 송준필이 제작한 「국내 통고문(國內通告文)」을 각처로 배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별개의 만세 시위 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기독교 측의 성주읍 용산리김희규도 이 소식을 듣고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조사 유진성(兪鎭成), 초전면 동포리의 기독교인 오임오(吳任吾) 등을 규합하여 4월 2일의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關帝廟) 뒷산에서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들고 성주읍 시장으로 나아가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장 중앙에 모여 있던 유림 측도 송우선·송회근의 주도하에 이에 호응했고, 송수근·송훈익(宋勳翼)·송규선·이봉희 등도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이태희(李兌熙)와 성명 미상자 2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이봉희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 군경이 주동 인물의 검거에 나서면서 장석영(張錫英)·송규선·송준필·이봉희·이기정·성대식·송문근·송회근·송훈익 등과 함께 송우선도 검거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며 재판에 회부되었다. 송우선은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했고,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의 기각과 함께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2년 3월 17일 향년 48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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