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275
한자 古代
영어공식명칭 Ancient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세기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성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인돌군의 형태로 미루어 청동기 시대 성주 지역에는 6개의 생활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세력권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외부의 선진 기술이나 정치력 혹은 새로 이주해 오는 유이민 등에 의해 정치적 통합과 발전을 지속하며 역사 시대로 돌입하였다.

[소국의 등장]

한반도 남부 지역은 기원전 1세기에 들어가면서 고조선 혹은 낙랑 지역 주민들의 유이민 파동에 의해 발달된 한(漢)의 철기 문화가 급속히 전파되고, 농경을 비롯한 철기 제작 기술의 발달로 정치체 간의 정복과 통합이 활발히 일어났다. 철기 문화와 함께 무문 토기가 주류이던 토기 제작 기술에도 한나라의 발달한 회도 문화(灰陶文化)의 영향을 받아 와질 토기(瓦質土器)라는 새로운 토기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창원 다호리(茶戶里) 유적이다.

창원 다호리 유적의 경우 『삼국지(三國志)』가 보여 주는 삼한의 국가 형성을 그대로 확인시켜 주는데, 한국 식동검 문화의 전통을 확실히 계승하면서도 철제의 무기류와 농기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 철기 제품들은 단조품과 주조품이 모두 섞여 있어 철기 제작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보여 준다. 이들 철기 제품과 함께 와질 토기 주머니호가 출토되어 이 단계에서의 와질 토기가 가지고 있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와질 토기가 성주읍 예산리에서 일괄 출토되어 기원전 1세기쯤 성주 지역에서의 변화의 추이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앞서 청동기 시대에 6개의 지역 세력으로 분립하고 있던 성주 지역의 세력권에도 이러한 유이민 파동에 의한 철기 문화의 파장이 여러 세력 사이에 우열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청동기 시대에는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존재하였던 백천(白川) 하류의 선남면 세력은 이 시기에 들어 이천(伊川) 하류의 성주읍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새로운 문화로 등장하는 와질 토기와 철기 문화가 성주읍 예산리에서 나타난 것이다. 예산리에서 출토된 와질 토기는 주머니호와 조합 우각형 파수부호(牛角形把手附壺)[쇠뿔 손잡이 단지] 등 와질 토기 전기 단계의 빠른 토기들이고 주조 철부 또한 부분적으로 단조된 것으로 제철 기술의 발달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와질 토기가 발견된 성주읍 예산리성주읍 중심부에 토성(土城)처럼 돋을 막 하게 뻗어 있는 언덕의 동북쪽 부분으로 야트막한 뒷산과 연결되어 있는는 약간 경사진 구릉이다. 이 예산리 와질 토기 및 철기 유물은 성주읍 지역이 성주 지역 6개 세력 집단 중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즉 성주읍 세력이 새로운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진한(辰韓)·변한(弁韓)의 한 소국(小國)으로 성립하여 역사 시대로 들어선 것이라 판단된다.

[성산가야와 신라]

낙동강 유역의 진한·변한 소국들이 지역 연맹체를 구성하면서 10여 개의 가야로 발전할 때 성주의 소국도 가야의 일원으로 가야 연맹체에 들어가 얼마간 가야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성산가야(星山伽耶) 혹은 벽진가야(碧珍伽耶)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이후 성산가야는 현 대구광역시 지역과 비슷한 시기인 4세기 중후반 신라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의 소국을 성립시켰던 예산리 목관묘 세력의 목관묘 구조와 출토 유물, 특히 철기와 옻칠 칼집 청동칼[칠초 동검(漆鞘銅劍)] 등 위세품에서 대구 팔달동 유적의 목관묘와 매우 유사한 양상을 찾을 수 있다. 이후에도 대구 달성을 중심으로 하는 내당동 고분, 비산동 고분 세력과 계속 친밀한 정치적 관계를 이어가면서 달성의 소국과 공동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제와 유물도 대구 지역과 아주 비슷하게 나타난다. 토기는 물론 관모[머리쓰개], 요패[띠드리개], 장신구 등 위세품도 모두 경주식이자 신라식이다. 이 위세품은 신라의 왕실에서 지방 정치체의 지배자에게 사여한 것이 대부분이다. 성주 지역 토기 양식과 위세품이 신라적인 것은 성주 지역이 신라 문화권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대구 지역이 경주의 사로국에 복속됨으로써 성주의 성산가야도 일찍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는 대구 달성의 비산동, 내당동 고분 세력을 지배하에 넣은 다음, 바로 원래 범신라적 문화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성주 세력을 복속시켜 은제 관식과 허리띠 장식 등 위세품을 사여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성주를 거점으로 소백산맥 서남 라인의 남쪽에 인접한 대가야를 견제하고, 또 백제 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지방 제도의 성립과 성주]

신라는 진흥왕 대에 들어와 북쪽으로 죽령선을 넘어 한강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562년(진흥왕 23) 대가야를 정벌하고 낙동강 서쪽의 고령군과 성주군 일대를 편입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이때 성주는 일리군(一利郡)으로 편제되었다. 성주 지역이 신라의 한 군현(郡縣)으로 편제되었을 때의 군현은 신라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원래 지역에 존재하던 성(城)이었다. 이것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 지방 제도가 성립되면서 그 규모에 따라 군현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군 규모의 여러 성들을 통할하는 커다란 행정 구획으로서 설치된 것이 주(州)였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에 최초로 삼척(三陟)에 실직주를 설치한 이래 525년(법흥왕 12) 2월 현 경상북도 상주에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였고, 한강 유역 및 낙동강 서부 지역과 동해안 북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550년대에는 광주(廣州)에 신주(新州)[553], 창녕에 비사벌주(比斯伐州)[555], 안변(安邊)에 비열홀주(比列忽州)[556]를 차례로 설치하였다. 이들 주는 그때그때의 작전상 필요에 따라 주치를 이동하였으며 주의 장관으로 군주를 파견하였다. 이는 군사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일종의 군관구(軍管區) 성격의 조직이다.

이와 같이 신라 군현의 하나로 편제된 성주군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삼국사기』「지리지」의 내용대로 일리군(一利郡)으로 불렸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중 농민이 거주하는 기본 단위는 촌락(村落)이었다. 촌락은 지방 행정 기구의 말단에 위치하여 재지 세력가인 촌주(村主)를 통하여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신라는 삼국 통일 후인 685년(신문왕 5) 전국을 구주 오소경(九州五小京)으로 정비하였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의 군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성주는 일리군에서 성산군(星山郡)으로 편제되었는데, 당시 영현(領縣)[군에 속한 현]은 네 개였다. 첫째 사동현(壽同縣)은 본래 사동화현(斯同火縣)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계자현(谿子縣)은 대목현이었는데 지금의 칠곡군 약목면이다. 신안현(新安縣)은 본래 본피현(本彼縣)으로 지금의 성주읍 지역으로 나중에 경산부로 개칭된 곳이다. 도산현(都山縣)은 본래 적산현(狄山縣)으로 지금은 그 위치를 알지 못한다. 소국 단위로 하였기 때문에 성주를 중심으로 성산군을 편제하면서 그 영역 범위에 있었던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던 것이다. 그 영역을 보면 지금의 구미시 황상동, 인의동 일대와 칠곡군 약목면을 포함하는 칠곡군 일부와 지금의 성주군 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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