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286
한자 星山郡
영어공식명칭 Seongsangun
이칭/별칭 이산군,가리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이동주

[정의]

통일 신라 시대 경덕왕 때 성주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

[개설]

성산군(星山郡)은 통일 신라 때 9주 중 하나인 청주[강주]에 속했던 군명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685년(신문왕 5)에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대상으로 행정 구역을 9주 5소경으로 정비하였다. 청주는 경덕왕 때 한화 정책(漢化政策)의 영향으로 강주로 개명하였다. 고대 성주 지역은 일리군(一利郡)으로 불렸지만 경덕왕 때 성산군으로 변경되었다.

[관련 기록]

오늘날 성주군은 신라 시대에는 성산군이라 불렀다. 『삼국유사』 5가야 중에는 성산가야가 확인된다. 성산가야는 세주로 그 위치가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였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본조사략』에도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5가야의 이름을 고치는데, 성산가야벽진가야로 하였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지리지」에서는 성주 지역의 지명 변천과 영역 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따르면 성산군은 본래 일리군(一利郡) 혹은 이산군(里山郡)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리(一利)라는 지명은 『삼국사기』 박제상(朴堤上) 열전에 등장하는 일리촌간 구리내에서 그 용례가 보인다. 일리촌일리군으로 확대되었고, 신문왕 5년 9주 5소경제가 확립되었을 때도 강주의 군현명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이산군(里山郡)의 경우 위화감이 든다. 이산군은 성주군(星山郡)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리(里)와 성(星)은 판각 과정에서 결획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산군은 경덕왕 대에 군명을 개명할 때 생긴 것이고, 고려 중기에는 가리현(加利縣)으로 불리었다. 경덕왕의 지명 개정 때 성산이라는 용어는 옛 이름의 음을 전하면서 차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여러 가야국들이 병립했을 당시 성산가야라 불렀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성주 지역의 소국이 벽진국(碧珍國)이었다면, 성산이라는 용어는 경덕왕 때 새롭게 창안하여 아름다운 글자로 고친 미개(美改)에 해당될 것이다.

성산군의 군치는 현재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일대로 추정되며, 영현은 구미시 인의동 일대의 수동현(壽同縣), 칠곡군 약목면 일대의 계자현(谿子縣), 성주군 성주읍 일대의 신안현(新安縣), 성주군 금수면 일대의 도산현(都山縣) 등이 있었다.

[변천]

성주는 성산가야의 고지로 알려져 왔고, 중심 고분이 성산동 고분으로 비정되어 왔다. 고분의 발굴 결과 다른 가야 지역과는 내부 구조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 밝혀졌다. 고고학적 성과를 놓고 보면 4세기 중후반에는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성산가야라 불린 것은 신라 병합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 시대에는 박제상 설화에 등장하는 일리촌간 구리내와 관련된 공간으로 이해되며, 일리군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성산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성주라는 지명은 고려 시대에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 1308년(충렬왕 34)에 경산부(京山府)성주목(星州牧)이 된 것이 그 시초이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성주는 낙동강 중류의 서쪽, 소백산맥이 서북쪽을 감싸는 가야산의 북쪽 사면에 있고, 서남쪽은 산지, 동쪽은 낙동강으로 대별된다. 성주는 이런 자연적인 지세로 인해 가야와 신라 간, 그리고 후삼국 시대의 고려와 후백제 간 쟁패의 장이 전개되는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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