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유림단 의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34
한자 第二次儒林團義擧
영어공식명칭 The Second Confucianists Affairs
이칭/별칭 유림단의거,군자금 모집 사건,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 봄연표보기 - 제2차 유림단 의거 발생,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대상 후보지 선정
종결 시기/일시 1926년 5월연표보기 - 제2차 유림단 의거 종결, 김화식 등 관련 인물 체포됨
전개 시기/일시 1925년 10월 - 신건동맹단을 조직하여 자금 모집 활동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김창숙|송영호|이봉로|김화식|정세호|곽윤|김황|정수기|손후익|신건동맹단

[정의]

1920년대 성주 출신 김창숙이 주도한 독립군 기지 건설 자금 모집 사건.

[개설]

제2차 유림단 의거는 경상북도 성주 유림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머물면서 구상하고 주도했던 것으로 만주와 몽골 접경 지대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통해 군사를 양성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로 자금을 모집한 사건이다. 제1차 유림단 의거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둔전제(屯田制)를 기반으로 군사를 길러 독립전쟁으로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위해 준비를 하였다. 중국 실력자들의 협조를 얻어가며 황무지 개간 허가까지 얻었으나 국내의 자금 모집의 곤란과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이 일로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 등 10여 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김창숙 등은 유림단 의거로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의열 투쟁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나갔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한국 독립의 기회로 이용하려던 제1차 유림단 의거는 일제의 방해와 국제 사회의 무관심으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김창숙은 독립 청원서를 파리로 보낸 뒤 상하이에 머물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유림의 대표라는 위상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이때 김창숙은 중국의 쑨원[孫文]을 비롯한 혁명 인사들을 두루 만나 한국 문제를 논의하였다. 또 전 외교 총장 쉬첸[徐謙]과 의논하여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를 조직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김창숙은 베이징[北京]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제 정세를 지켜보면서 단시일 안에 독립을 달성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장기적인 방안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1921년 김구(金九)가 앞장서서 만든 한국노병회나 1920년대 중반 안창호(安昌浩)의 이상촌 건설 계획, 이회영(李會榮)의 자치촌 건설 계획 등도 그러했다. 김창숙의 계획은 일본 세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몽골 국경 지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것이 제2차 유림단 의거의 시작이었다.

[경과]

김창숙제2차 유림단 의거는 1925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창숙이 대상 토지로 눈여겨 본 곳은 러허[熱河]와 치치하얼[齊齊哈爾], 또는 내몽골 지역이었다. 이회영의 의견에 따라 참의원 이몽경(李夢庚)과 중국 국민당 정부 외교 총장을 지낸 쉬첸 등을 만나 황무지 개간 문제를 협의하였다. 쉬첸은 김창숙이 상하이에서 중한호조회를 만들 때부터 알고 지낸 실력자였다. 김창숙의 부탁으로 쉬첸이 군벌 펑위샹[馮玉祥]을 찾아가 논의하였다. 독립운동 기지를 둔전제로 경영하면서 독립전쟁을 준비한다는 계획을 말한 것이다. 그 결과 내몽골 지역인 수원(綏遠)과 포두(包頭)의 개간 가능한 땅 약 9만 9174㎡[3만 평]을 약속을 받았다. 마침내 김창숙의 원대한 계획인 황무지 개간권이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자금 마련이 과제였다. 김창숙은 모집 금액을 20만 원으로 잡았다. 자금 모집 대상은 영남 유림이었다. 마침 서울에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영남 유생들이 자주 왕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창숙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서울로 보낼 요원을 정하고 스스로 서울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상하이에서 서울로 보낼 요원으로 확정한 사람은 경상북도 영주군 장수(長壽) 출신 송영호(宋永祜), 달성군 하빈(河濱) 출신 이봉로(李鳳魯), 봉화군 법전(法田) 출신 김화식(金華植) 등이었다.

이들은 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면 무기도 사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무기도 구입하였다. 이것은 1910년대 대한광복회가 모금하던 방식이기도 하였다. 무기는 성주군 청파(靑坡) 출신 정세호(鄭世鎬)를 앞세워 모젤식 자동 권총 2정과 탄환 25발을 구입하게 하였다.

김창숙은 1925년 6월 송영호를 먼저 국내로 들여보낸 뒤, 8월 중순 국내로 들어왔다. 서울 관훈동에 마련된 면우집간소(俛宇集刊所)를 왕래하는 한주학파(寒洲學派) 인물들을 합류시키고자 먼저 곽윤(郭奫), 김황(金榥), 정수기(鄭守基), 손후익(孫厚翼) 등을 만난 뒤 바로 자금 모집에 나섰다.

송영호는 자신의 토지를 팔아 4~5회에 걸쳐 1,200여 원을 마련하여 김창숙에게 전달하였고, 김화식은 대상 인물을 찾아 소개하였다. 그러나 자금 모집이 뜻과 같지 않자 의열 단체를 조직하여 무력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1925년 10월 신건동맹단(新建同盟團)을 조직하였다. 신건동맹단은 모집단과 모험단 두 개의 부서로 편성되었는데, 국내에서 활약하던 인물들은 모집단이 되고, 베이징에서 들어온 인물들은 모험단이 되었다. 모집단은 활동 담당 지역에서 자금을 요구하고 불응할 때에는 모험단의 존재를 알려 위협함으로써 목적 달성을 쉽게 하려 하였다.

모험단에 속한 김화식·송영호·정수기 등은 권총으로 무장하고서 친일 부호 처단과 자금 모집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자금 모집은 1925년 10월 하순 대구와 대전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경상북도 성주와 봉화 지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성과는 적었다. 무엇보다도 유림들이 여기에 호응할 형편이 아니었다. 제1차 유림단 의거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창숙이 1926년 1월 대구에서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사돈 이재락(李在洛)의 집을 거쳐 동래 범어사에서 겨우 치료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경찰의 추적도 시작되었다. 김창숙은 하는 수 없이 활동을 접기로 하고 3월 26일경 서둘러 국내를 빠져나왔다.

[결과]

김창숙이 떠난 1주일 뒤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이 체포되면서부터 5월 중순까지 관련 인물들이 대부분 붙잡혔다. 김창숙은 1926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모아온 돈의 사용 방안을 두고 고민하던 끝에 의열 투쟁을 벌이기로 작정하였다. 이동녕(李東寧), 김구, 김두봉(金枓奉), 류자원, 정원 등과 만나 국내 인심을 되살리기 위해서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보내 총독부 산하 기관을 파괴함으로써 의기를 고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두가 동의하였고, 김구는 나석주(羅錫疇)를 추천해 주었다.

김창숙은 모아온 돈으로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이들에게 주었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공격하는 의거를 펼쳤다. 이 사건 이후 김창숙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통이 심해 몰래 공동조계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밀정의 신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김창숙은 국내로 옮겨져 1927년 12월 징역 14년을 선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자금 모집의 곤란과 일제의 탄압으로 2차 유림단 의거는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을 의열 투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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