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서산 한티공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1292
한자 瑞山-公所
영어음역 Seosan Hantigongso
영어의미역 Hanti-Gongso Catholic secondary station
이칭/별칭 대곡[리]공소,벌뜸공소,송뜸공소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한티2길 3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870년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공소 설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연표보기 - 공소 강당 건축
최초 설립지 서산 한티공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한티2길 36[대곡리 778]지도보기
성격 공소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에 있는 서산 해미성당 소속 공소.

[개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는 성당과 멀리 떨어진 마을이나 소도시에서 신부의 임명을 받은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신자 공동체이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지만 성당에 소속되며, 대개는 교우촌인 경우가 많았다. 공소에는 1년에 두 차례 ‘판공성사’[신자들이 일 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고해 성사]라는 이름으로 성당 신부의 공적 순방이 이루어졌다.

서산 한티공소는 1870년대에 이미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합덕성당 소속 공소였다가 서산성당이 설립되면서 서산성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서산 해미성당 분리 후에는 서산 해미성당으로 편입되었다가 1980년대 이후 이농 현상과 도시화 및 교통의 발달로 점차 공소로서의 의미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

서산 한티공소는 조선 후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특히 덕산과 해미의 분계 지점이자 두 지역을 잇는 서산 한티고개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천주교가 박해 받던 시기에 해미에 수감된 신자들을 돌보거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기를 원하는 가족들이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변천]

서산 한티공소[대곡리공소]가 형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천주교가 박해 받던 18~19세기부터 신자들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0년 박해가 종식되고 내포 지방을 관할하는 합덕성당이 설립된 이후, 1893년 정식으로 공소가 설정된다. 그 후 1908년 서산성당의 전신인 수곡성당이 설립되면서 서산성당으로 편입되었다.

1918년 공소가 커지면서 벌뜸과 송뜸으로 나뉘기도 했는데, 당시 서산 해미면 대곡리의 신자 수는 두 공소를 합쳐서 152명이었고, 1923년에는 170명에 달하였다. 1943년 공소회장 김인제[세례명 안드레아]의 주도로 공소 신자들이 힘을 합쳐 현재의 공소 강당을 건축하였다. 1985년 서산 해미성당이 분리됨에 따라 공소 역시 서산 해미성당 소속이 되었다.

[현황]

현재 신자는 10여 세대이고, 1990년대 말 이후로는 신부의 공소 방문이 없다. 신자들은 서산 해미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서산 한티공소는 공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현재 공소 강당도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내포의 각지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의 압송로 서산 한티고개에 위치한 서산 한티공소는 천주교 신자들의 피신처인 동시에 수감된 교인들을 돌보거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교우촌이었다. 박해 이후에는 그대로 큰 공소가 되어, 한때 서산성당 전체 신자의 약 10%에 해당하는 교세를 가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서산 한티공소는 지리적으로 순교지 해미와 그들의 생활지를 잇는 연결고리인 동시에 역사적으로는 박해기와 천주교의 성장기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