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294
한자 鐵器時代
영어공식명칭 Iron Ag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이헌재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철기를 도구로 만들어 쓰던 시기.

[개설]

우리나라의 철기시대는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기원전 5~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4~3세기경부터 한군현(漢郡縣)의 영향으로 단조(鍛造) 철기가 대량으로 보급되는 기원 전후까지를 초기 철기시대로 설정하고 이후 3세기까지를 철기시대 또는 원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경기도 시흥시와 인접한 화성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철기시대 유적이 출토되고 있지만, 시흥시에서는 아직 관련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에 이어 기원전 4~3세기경 중국의 철기 문화의 영향으로 한반도 남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경기도 시흥시를 비롯한 한반도 중서부 지역이 본격적인 철기시대로 진입한 시기는 삼한시대로 일컬어지는 때부터이다. 즉, 기원전 2세기경 위만(衛滿)이 고조선(古朝鮮)의 권력을 차지하자 남하한 고조선의 준왕(準王) 집단,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멸망 등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고조선 유민, 낙랑군(樂浪郡) 등 한(漢)이 설치한 군현과의 교류로 철기의 도입이 본격화되었다.

초기 철기시대는 중국 동북 지역에 자리 잡았던 연(燕)의 영향으로 주조(鑄造) 철기가 보급되고 덧띠토기[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세형동검(細形銅劍)[한국식 동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가 유행하였다. 철기가 보급되면서 이전에 사용되었던 간석기와 함께 삽, 괭이, 낫과 같은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가 사용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칼, 창, 화살촉 등 철제 무기가 생산되면서 부족 간의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농업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는 정착 생활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국가 간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2018년 현재 시흥시 지역에서 철기시대의 유적은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근 지역인 화성시에서 발견된 초기 철기시대 유적으로는 화성시 병점동의 독무덤[옹관묘(甕棺墓)]이 알려져 있고, 화성시 향남읍 발안리 유적에서 원형 덧띠토기와 검은간토기[흑도(黑陶), 흑색마연장경호(黑色磨硏長頸壺)]가 부장된 널무덤[토광묘(土壙墓)]이 확인되었다.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어섬은 조개더미[패총(貝塚)] 유적으로 초기 철기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赤褐色軟質土器) 조각들이 수습되었다. 이 유적은 어섬 꼭대기의 서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 10~20m가 되는 낮고 완만한 구릉 지대에 있다. 덧띠토기가 확인된 유적으로는 화성시 향남읍 도이리 유적과 반송리 행장골 유적이 있다. 화성시 동학산 유적은 중국 요령 지역과 관련이 깊은 덧띠토기 문화로 이해되는데, 고인돌 사회와의 마찰을 피해 비교적 그 세력이 약한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철기시대]

철기시대는 야철(冶鐵) 기술의 보급으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발전을 가져와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정치체(政治體)가 성립되었다. 역사적으로 북부 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등장하는 시기이고, 남부 지역에서는 삼한(三韓)[마한, 진한, 변한]이 자리 잡았던 시기이다. 이후 삼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독자적인 중심 세력이 형성되면서 백제, 신라 및 가야가 발전하였다.

경기 지역의 본격적인 철기시대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백제가 초기 국가로 출현하는 3세기 중후반 무렵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청동기의 소멸, 철기 생산의 활발, 벼농사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경질(硬質) 민무늬토기의 출현 등이다.

2018년 현재 시흥시에서 철기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에도 상당한 인구가 시흥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사시대 취락 유적이나 무덤[분묘(墳墓)] 유적들이 해안이나 강가의 평지나 넓고 낮은 구릉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시흥 지역에도 철기시대 유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낮다. 향후 벌판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지의 조사에서 철기시대 유적지 발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흥시 인근 지역의 철기시대 유적으로 화성시 봉담읍 당하리와 화성시 청계동 유적 등이 있다. 당하리 유적은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서 3세기 중반까지의 철기시대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화성시 기안동에서는 대규모 제철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 유적에서는 철기시대 토기를 만들던 공방과 수혈유구(竪穴遺構)가 조사되었으며, 가마도 발굴되었다. 화성 발안리 유적은 경기 서남부 지역에서 확인된 철기시대 최대 마을 유적이다. 화성 발안리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백제의 수혈(竪穴) 집터 57기, 구상유구(溝狀遺構) 63기, 굴립주 건물지(掘立柱建物址) 30동, 작은 수혈유구 196기, 독무덤 4기, 야외 화덕자리[노지(爐址)] 5개 등 총 370여 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철기 문화의 특징]

한국의 철기 문화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 초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주조 철기로 쇠도끼[주조 철부(鑄造鐵斧)]를 비롯한 각종 농기구나 공구류가 제작되었다. 철기의 자체적인 생산은 기원전 2세기경부터이며 이때부터 단조 철기도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철기 생산의 본격화 및 현지화, 제조 기술의 발전은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즉, 새로운 경질 민무늬토기의 출현, 생산력의 증대와 같은 결과를 낳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 통합이 가속화되어 여러 국가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철기시대 철로는 농기구와 공구류인 'U' 자형 삽과 낫, 작은 칼 및 도끼와 끌이 있다. 무기류로는 큰 칼[대도(大刀)], 화살촉, 창과 방패, 갑옷 등이 있다. 용기류로는 복(鍑)[가마솥], 호(壺), 교구(鉸具)[허리띠 장식], 낚싯바늘, 정(鼎)[솥], 함(函), 연(㿼)[주발] 등을 제작하였다. 시흥시 인근 지역인 화성시 기안동 제철 유적에서는 규모가 20만여 평[약 66만㎡]에 이르는 대규모 제철 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제철 유적에서는 숯가마[탄요(炭窯)]가 조사되었는데, 대규모의 송풍관과 함께 송풍구, 철제 방울 거푸집, 가마 벽체 조각, 숫돌, 단조 박편 등 다양한 제철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철기시대에는 4주식(四柱式) 장방형, ‘철(凸)’ 자형 또는 ‘여(呂)’ 자형 집터 유적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서 확인된다. 집터의 평면 형태는 전기에 장방형(長方形)[직사각형]이지만 점차 그 형태가 변화하여 후기에는 육각형(六角形)의 집터가 출현한다. 집터 내부에는 중도식(中島式)의 화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집터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과 과실류, 어패류, 조류, 포유동물의 유체가 발견되어 다양한 식재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시대에는 밭 유적뿐만 아니라 벼농사를 짓기 위한 논과 함께 관개(灌漑)를 위한 수로(水路), 보(洑) 등이 조사되었다. 철기시대의 무덤으로는 널무덤과 독무덤, 주구묘(周溝墓)[매장 주체부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굴착한 형태의 분묘], 돌무지무덤 및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둥글게 봉분을 쌓은 후 돌을 지붕처럼 덮은 형태] 등이 있다. 한편 철기시대 서해안 지역에서는 조개더미 유적이 증가하는데, 이는 삼각형 덧띠토기나 철기 유입과 관련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기원전 2세기경 경기도 시흥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 지역은 고조선의 사회 변동에 따라 많은 유이민이 내려오면서 철기 문화와 토착 문화가 결합하여 마한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정복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마한에서 신지(臣智), 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부족장의 세력이 성장하였다.

마한의 부족장이 정치적 지배자였다면, 종교적 지배자는 천군(天君)이었다. 천군은 씨뿌리기를 마친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계절제를 주관하였다. 천군은 신성한 지역인 소도(蘇塗)에서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는 군장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죄인이 도망해 숨더라도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를 통해 삼한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시흥시 지역이 마한 54국 중 어느 국에 속하였는지는 더 연구해 보아야 하지만, 시흥시 인근 지역과 같은 사회 제도와 풍습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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