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시흥의 신안 주씨 일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610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훈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7년 4월 -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주영식 자선 기념비 건립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주영식 자선 기념비 -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355 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에서 100년간 3대에 걸쳐 가난한 이웃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누고 베푼 신안 주씨 일가의 선행.

[개설]

신안 주씨(新安朱氏) 가문은 17세기 전반부터 시흥 지역에 자리 잡았다. 과림동 주씨 가문의 주석범(朱錫範)[1815~1880], 주순원(朱順元)[1836~1895], 주인식(朱寅植)[1862~1945]과 주영식(朱英植)[1867~1952] 형제로 이어지는 3대는 조선 말기부터 한 세기 동안이나 선행을 이어갔다. 궁핍한 이웃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영농자금을 대 주었다. 신안 주씨 일가의 나눔과 배려에 감사하는 뜻에서 과림동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자진해서 십시일반 의연금(義捐金)을 모아 주씨 가문의 선행을 기리는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로 꼽힌다.

[가풍이 된 나눔 정신]

시흥 지역 신안 주씨 집안은 17세기 전반 지금의 시흥시 과림동 인근 계수동 고갱이마을에 자리 잡아 신안 주씨 고공리파(古孔里派)로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무공을 세운 주몽룡(朱夢龍)의 후손으로 무반 집안의 전통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3세 적선(積善)의 가풍을 확고히 한 주석범은 행경복궁오위장(行景福宮五衛將)을 지냈다. 선행으로 이름을 알린 3대는 주석범, 주순원, 주인식과 영식 형제이다.

주순원은 주석범의 맏아들이다. 주석범은 주순원, 주순영, 주순거, 주순홍 등 아들 4형제를 두었다. 주순원의 아들로 되어 있는 주인식은 원래 주순영의 장자이나 주순영이 일찍 사망하여 큰아버지 주순원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주영식도 역시 주순영의 둘째 아들이지만 같은 이유로 숙부인 주순홍의 양자가 되었다. 주석범과림동 중림마을에 터를 잡고 살았다.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주영식은 아침 일찍 뒷산에 올랐다고 한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 집이 있나 살펴보기 위해서다.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는 양식을 보냈다.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는 가풍은 할아버지 주석범 대에 시작되었다.

주석범의 생몰 연대를 보면 순조 15년에서 고종 17년이다. 조선의 정치가 가장 어지럽고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던 시기에 해당한다. 아들 주순원도 헌종 2년에 태어나 고종 32년에 사망하였다. 손자 주인식은 철종 13년에 태어나 해방되던 해인 1945년까지 살았고, 주영식은 고종 4년에 태어나 6.25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2년까지 살았다. 주씨 3대가 살았던 역사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3대의 선행은 더욱 빛난다.

신안 주씨 3대는 과림동의 중림, 부라위계수동 안골의 절량빈민(絶糧貧民)[곡식이 떨어져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에게 양곡을 구휼했다. 연말에는 세찬으로 북어, 쇠고기, 김 등을 나누어 주었다. 봄철에는 영농비도 무상 혹은 무이자로 빌려 주어 해당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힘썼다.

주씨 집안의 재산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주씨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토지 명문(明文)[토지나 집 등을 매매할 때 사용하는 계약서]이 80건에 달해 과림동에서는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식의 생애]

주인식은 원래 주석범의 둘째 아들인 주순영의 아들이다. 주인식이 8세 때 아버지가 죽자 큰아버지 주순원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주인식의 동생 주영식은 숙부인 주순홍의 양자로 갔다. 주인식은 할아버지 주석범이 늘 곁에 두고 가르쳤다. 당시 주씨 집안은 과림동 중림만이 아니라 경성[서울]에도 집이 있었다. 주인식은 할아버지를 따라 경성 만리현[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 집으로 이주하였다. 주인식은 17세 되던 해부터 기름 장사를 시작했다. 19세부터는 기름 짜는 기계를 사서 동생 영식과 함께 사업을 벌였다. 27세 무렵부터 30대 초반까지 사업이 번성해 재산을 모았다. 주인식의 재산은 이때부터 더욱 불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식은 기름 사업에서 종이 사업으로 진출하였으나 37세 무렵부터 5~6차례 큰 손해를 보았다. 사업은 순탄치 않았으나 주인식은 꼼꼼하고 이재(理財)에 밝았다. 주인식은 돈을 모으는 대로 토지를 사들였다. 당시 농업이 주 산업이었으므로 미곡 가격의 등락과 토지 가격을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주영식 역시 형과 함께 사업을 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주인식은 토지를 매입할 때 전답만이 아니라 임야와 대지도 사들였다. 반면 주영식은 전답을 주로 샀다. 주영식도 주씨 집안의 후손으로서 이웃을 돕고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新安朱氏三世積善碑) 옆에 주영식 자선 기념비(朱英植慈善紀念碑)가 세워진 것만 봐도 그의 선행 역시 형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주인식은 1906년부터 경성 만리현에서 현용택과 함께 국어, 영어, 일어를 가르치는 야학으로 균명의숙 운영에 나섰다. 균명의숙은 1910년 사립 균명학교가 되었다. 주인식은 균명학교의 감독장이었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 비각을 건립할 때 경성의 인사들도 참여한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주인식은 38세가 되던 1899년(고종 36)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인식은 『매일록사(每日錄事)』라고 이름한 이 일기에 당시의 정세와 사회상, 집안의 대소사, 사업 등을 기록해 나갔다. 주인식은 경술국치로 조선이 망하자 나랏일과 사회적 관심보다는 가업과 재산 관리에 집중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라 잃은 슬픔을 잊으려 사업에 더 몰두했다고 해석된다.

주씨 집안 소유 토지가 광복 후에도 과림동은 물론 경기도와 충청도에 있었다. 주씨네 땅을 밟지 않고는 시흥 땅을 지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주인식의 재산 규모는 정확히 얼마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주씨 집안이 가지고 있는 일제강점기 전시공채(戰時公債)가 440장 액면가 5,000엔에 이른다. 당시 조선은행 은행원의 월급 70엔의 70배가 넘는 거금이다. 전시공채는 일제가 강제로 매입하게 한 공채다. 주씨 가문의 재산 규모보다 중요한 점은 주인식과 주영식 형제가 가난한 이웃에 아낌없이 베푸는 가풍을 이었다는 점이다. 시흥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지 사람들도 주씨 형제를 칭송하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주민들이 직접 세워준 적선비]

시흥시 과림동 355 중림사거리[비석거리]에는 신안 주씨 3대의 적선을 기리는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주영식 자선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1917년 4월에 세워졌으며 5년 뒤인 1922년까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까지 건립되었다. 주영식 자선 기념비는 1924년에 세워졌다. 주영식 역시 자선에 힘썼으나 족보상 직계 장자가 아니었기에 별도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두 비석이 있는 장소는 2004년 12월 공원으로 꾸며졌다. 두 비석과 비각은 2005년 7월 시흥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비석 창립 통문(通文)[조선시대에 민간 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에는 비석을 세우는 취지가 드러나 있다. 주영식 기념 자선비 창립 통문을 보면, “주인식의 조부가 넉넉지 않은 재산으로 풍흉을 막론하고 매년 춘궁기가 되면 많게는 34석, 적게는 10여 석은 조맥(租麥)을 이자 없이 대금(貸金)한 지 80여 년이 되었으며 본색(本色)[원래 정한 세곡(稅穀)의 종류]은 잃어버린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러한 뜻을 이어받아 10년을 한결같이 행하여 두루 가난한 이를 구휼함이 근 백 년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 창립 발기문에는 “기념품 중 값이 싸고 영구 보존함이 비를 세우느니만 못하므로 우러러 여러분께 청하오니, 각자 능력대로 주씨 삼대 적선의 은혜를 표시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라고 적혀 있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를 건립하기 위해 한긍렬, 민재철, 장선엽, 김상준 등 21인이 발기하여 모금 운동을 벌였다. 모금에는 모두 104명이 참여하였는데, 대부분 당시 돈으로 1~2엔에서 40~60전 정도 냈다. 말 그대로 십시일반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모금액이 편차를 보이는 것은 모금 운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반증이다. 비석은 3월에 세워졌다. 비석의 앞면에는 “우리가 기리는 삼세,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모두 어질어서 기쁘게 주고 베풀기를 좋아한 지 어언 팔십여 년이 되었네. 선을 쌓으면 경사가 있다는 것을 하늘은 어기지 않으리. 번성하고 번성하여 복이 영원히 이어지소서[我公三世喜捨好施 祖子孫賢八十斯年積善有慶俾昌俾熾不違者天後祿綿綿].”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 뒷면에는 “1917년[丁巳年] 4월에 세우고 과림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 건립은 5년 뒤인 1922년 2월에 발의되어 1922년 4월에 준공되었다. 비석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부터 고을 수령의 선정을 기리는 공덕비는 전국 각지에 무수히 세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석은 백성들의 자발성보다는 강제 징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에 비해 과림동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주씨 가문의 선행에 감동한 주민들이 뜻을 모으고 자금을 조금씩 내어 건립되었다. 게다가 비석이 상할까 염려하여 또 한 번 돈을 모아 비각까지 세웠다. 유사한 경우를 찾기 힘든 비석과 비각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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