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성리 고성산성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0730
한자 八城里古城山城址
이칭/별칭 성산산성(城山山城),고성(古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30
시대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집필자 신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사항 시기/일시 2004년 - 팔성리 고성산성 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소재지 팔성리 고선산성터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30지도보기
성격 산성|산성터
소유자 사유지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있는 산성 유적.

[개설]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30번지 일대에 분포하는 포곡식(包谷式) 토축 산성이다. 산성이 위치한 골짜기는 남서쪽으로 열려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있는 높이200m 내외의 아홉 개의 봉우리로 연결된 능선 위에 산성을 축조하였다. 삼국 시대에 처음 축성하여 조선 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문헌 기록으로 보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다시 토성(土城)을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산성의 길이는 약 1㎞ 정도 확인되며, 산성의 북쪽 봉우리에는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가 있다.

[변천]

팔성리 고성산성터에 관한 문헌 기록은 1832년경에 발간된 『경상도읍지』 의성현조에 나타나 있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가장 이르다고 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만력(萬曆) 25년(1597)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대가 왜를 정벌하고자 수년간 주둔할 때, 유격 대장 엽사충(葉思忠)이 의성현의 진영에 머물면서 성산에 토성을 축조한 것으로서, 둘레가 4·5·6리 정도로 그 터가 늘 있었는데 지금의 봉수터이다[城山山城 在縣南五里 萬曆丁酉 天兵爲征倭來屯守數年 遊擊葉思忠留陣本縣 築土城於城山 周回四五六里 基地尙存 今烽燧地也]” 라고 기록하고 있다. 1871년 간행된 『영남읍지』 의성현지에서도 『경상도읍지』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있다.

1864년경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고성(古城)은 서쪽 5리에 있으며 선조 30년[1597]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정벌할 때 옛 성터를 개축하여, 이곳에 머물렀으며 둘레는 5리가 넘고 지금 그 터가 남아 있다[古城 西五里 宣祖三十年 天將征倭時 因古址改築屯于此 周五里餘 今有遺址]” 는 내용으로,『경상도읍지』와 『영남읍지』에 기록된 성산산성의 내용과 같다. 다만 『경상도읍지』와 『영남읍지』에서는 ‘현의 남쪽 5리’라 했으나 『대동지지』에서는 ‘서쪽 5리’라 하여 방향이 서로 다른데, 실제로 의성현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어 의성현 치소의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한편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와 『영남읍지』 의성현 지도에는 남대천의 남안(南岸)에 있는 구성산(九成山)의 성산 봉수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현 팔성리 고성산성 터팔성리 고성산 봉수터가 분명하다. 따라서 성산산성과 성산 봉수를 남대천의 북안에 위치해 있는 치선리 산성터로 비정한 기왕의 자료 내용[『의성군 문화 유적 지표 조사 보고』[대구대학교 박물관, 1987], 『의성 군지』[의성 군지 편찬 위원회, 1998]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위치]

팔성리 고성산성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30 일대에 위치한다. 의성읍의 남단에 있는 의성 중학교 앞에서 서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가로질러 나가면 강변 도로인 남대천길과 만나는데,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제2 구봉교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다시 남쪽으로 17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골짜기 입구가 나타난다. 이 골짜기 입구가 팔성리 고성산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며 골짜기의 길이는 약 500m 정도 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98년 4월~5월 사이에는 의성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에서 의성 관내 봉수 유적에 대한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가 있었다. 또한 1987년 5월~11월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 의한 지표 조사가 있었고, 2004년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의성군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산성 내부로 통하는 남서쪽의 골짜기 입구로부터 성 내부 깊숙한 곳 까지 농로가 나 있으며 밭과 과수원으로 경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는 구봉산[구성산]은 전반적으로 숲이 우거진 상태이지만, 산성의 성벽이 있는 능선을 따라 군데군데 개간이 되어 밭으로 경작되거나, 일부는 체육 공원과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다만 성벽의 서쪽 부분에서 능선 상단을 삭토하여 정지한 곳이 확인되며, 남쪽 끝부분에서도 토성의 일부와 망루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길이는 1㎞ 정도이며 높이는 1m 내외이다. 산성을 따라 능선의 북쪽 봉우리에는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가 있고 그 아래쪽 경사면에는 수도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 봉우리에는 팔성리 봉외정이 있다.

[의의와 평가]

팔성리 고성산성 터는 1832년경에 발간된 『경상도읍지』에는 성산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1864년경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 기록된 고성이다. 이와 같은 문헌 기록을 통해 이 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정유재란 때 토성을 새로이 개축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대천을 따라 형성된 천혜의 단애를 이용하면서 남대천을 천연 해자(垓子)로 삼아 구축되었다. 이 산성은 의성읍 남서쪽에 인접해 있어 유사시 의성현 치소의 대피성(待避城)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위치로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와 1871년 『영남읍지』 의성현 지도에 그려져 있는 구성산(九成山)의 성산 봉수, 즉 현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와 함께 그 기능과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1.동쪽 봉우리에는 팔성리 봉외정이 있다. - 봉의정으로 수정 요망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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