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076
한자 裵容度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8월 25일연표보기 - 배용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2일 - 배용도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독립 만세 시위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7일 - 배용도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 받음
몰년 시기/일시 1971년 4월 15일연표보기 - 배용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배용도 대통령 표창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배용도(裵容度)[1895~1971]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12일 쌍계동의 3·1 운동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영화(朴永和)·김원휘·박영신(朴永新) 등은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배용도를 비롯한 배도근·배용석·이일만·김명출·박세길 등이 합세하였다. 배용도는 3월 12일 박영화·박영신 등과 함께 200장 정도의 태극기를 만들던 중 오전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를 부르고 정오 무렵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와 동민들과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그는 함께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동리를 시위 행진하였고,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이날 오후 4시 의성 경찰서에서 파견된 조선인 경부와 순사 부장, 그리고 비안 주재소 경찰들에 의해 배용도를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은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

배용도는 1919년 4월 17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다. 5월 15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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