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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8일 미군정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친일파 처단과 토지 분배 및 소작료 인하를 관철시키고자 일어난 항쟁이다. 양산의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8일 오후 1시 15분 양산시장에서 6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이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시위군중은 깃발을 앞세우고 ‘식량공출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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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과 4월에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 신평마을과 양산읍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와서 통도사 강원(講院) 학생 대표들과 만나 만세 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고 1919년 3월 13일 신평(新坪)마을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또 인근 부산에서는 1919년 3월 11일 부산 초량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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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7일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양산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운동.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던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지시로 통도사에 내려와 통도사 강원(講院) 학생 대표들과 만나 만세시위를 할 것을 결의하여 1919년 3월 13일 신평의거가 발생하였다. 이어서 양산읍내에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발생한 초량일신여학교 시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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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농민운동가. 1931년 4월 4일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다가 1932년 3월 16일 양산농민조합의 간부가 구속당하자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강만수는 300여 명의 조합원과 함께 경찰서 정문에서 대치하면서 구속한 간부를 무조건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검거되어 1932년 10월 13일 벌금 50원의 형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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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재호는 유년 시절 윤현진으로부터 항일 정신을 배웠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양산군 양산읍에서 장이 선 날을 이용하여 엄주태, 박삼도, 전병건, 정주봉 등과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강재호는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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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경상남도 양산군에서 작성한 출두리와 사덕리의 전답 양안. 양안은 군 단위 양전(토지 측량)의 결과를 기록한 일종의 토지대장이다. 임진왜란 이후 1720년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일시에 도별로 양전이 행해졌다. 이를 ‘경자양전(庚子量田)’이라 한다. 경자양전 이후로는 도별로 양전을 행한 적은 없고, 필요할 경우 군현별로 정부의 허가를 얻어 양전을 시행하였다. 군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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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일본 센슈[專修]대학 법과에 재학 중이던 1942년을 전후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주장은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므로 일본이 패전하여 혼란기에 봉착했을 때 봉기하여 독립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궐기한 민중을 지휘하여 방화·진화·방해·교통 노선 파괴·식량 창고 소각 등의 세부 계획 등을 설정해 놓고 활동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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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여성 운동가. 권은해는 1903년에 지주였지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부친 권상중(權商重)과 모친 강처일(姜處一) 사이에서 1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권은해의 아버지는 개인 재산으로 기장의 사립 학교인 보명학교와 명정의숙을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지역의 인재 양성 교육에 기여하였고, 지역의 유지, 지주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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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 서병희 의병부대는 박동의 의병부대에서 독립한 부대로, 양산 등 경상남도 전역을 무대로 활약하면서 일본 수비 대원, 관공서, 일본 상인, 친일파 등을 공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중에서 권중옥은 서병희 의병부대가 이동을 할 때 길을 인도하는 등 향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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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군수를 역임한 문신. 권중은은 1906년(순종 즉위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에 양산 최초의 근대학교인 양성학교(養成學校)를 설립하였다. 양성학교는 권중은이 전경무관(前警務官) 전태준(全泰準)과 일본 헌병대장 마쯔오[松尾]로부터 의연금을 받아내고, 이 의연금을 바탕으로 전의관(前醫官) 최현근(崔現根), 정지모(鄭智謀), 사인(舍人) 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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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말기 양산군수 권중은(權重殷)의 치적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906년 양산군수로 부임한 권중은이 첫해부터 교화에 힘써 민속이 검소해졌고, 봉급을 덜어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세금을 감해주는 등 백성의 피폐함을 구해준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오른쪽 비석군의 앞줄, 정문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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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전후에 대한청년단을 이끈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인물.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서룡리 신주마을에서 태어난 김갑조는 6·25전쟁을 전후하여 공비들의 출몰이 심해지자 의용경찰(대한청년단 전투대)에 앞장서 향토 방위에 힘쓰는 한편 공비 토벌 작전에도 참가하였다. 1951년 봄, 김갑조는 기습해 온 공비 몇 명을 기지로 유인, 생포하여 원동 지서에 인계하였다.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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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울 유학생 도진호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학생 강재호 등과 함께 1만 매를 인쇄하여 전국적으로 배포할 때 김경환은 경상북도 선산·상주 지역에서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 입단하였다. 그러다 박장호 휘하에서 번시후[本溪湖] 총관으로 임명을 받아 활동하였다. 그 후 지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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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덕봉은 1919년 9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각지의 부자들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동시에 한쪽 면에는 태극기와 ‘독립 기념’이라 새기고 다른 한쪽 면에는 ‘민국 원년’이라 새긴 50전짜리 은메달을 건네는 대가로 군자금을 모집하던 김두현(金斗鉉)·김두옥(金斗玉)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였다. 또한 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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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2년 김시학·성상호 등과 공모하여 1932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부산 시내 노동자를 선동하여 시위를 감행하기로 한 뒤, 1932년 4월 27일 부산불교학원 내에 있는 등사판을 절취하고 격문 300장을 등사하여 부산 지역에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8월 1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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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행정 관료. 청도김씨(淸道金氏) 29세손으로, 1932년 3월 양산시 남부동에서 출생하여 양산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광복 후 학제 변경시에 경남고등학교로 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5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 재학시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외교행정)에 합격하였고 2년 뒤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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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말복은 조국의 광복에 헌신하고자 신학문을 배우며 항일 민족 의식을 키웠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통도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韓龍雲)의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사』 및 『님의 침묵』 등의 저서를 읽었고,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6년 동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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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9월경 중앙학림을 졸업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하다가, 의용승군·대동단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민오로부터 대동단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1일 대동단으로부터 경부선·연변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위임장과 함께 『독립신문』 7부, 경고문 5부, 인민 봉기 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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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 승려로서 김법린, 김상헌 등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서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919년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1월 29일에 출옥하였다.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였는데, 일명 김일성으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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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상기(金相琦)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의 학생이었다. 당시 범어사에는 초등학교 과정의 명정학교(明正學校)와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다. 한편 서울에서 거족적인 3·1운동이 계획되면서 불교계의 민족 대표 한용운이 양산에 내려와서, 주지 오성월(吳星月) 등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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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 당시 범어사 지방 학림 학생으로서, 한용운의 밀지를 받아 통도사에 내려온 오택언과 함께 신평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으나, 3월 7일 밀고로 인해 오택언이 압송당했다. 하지만 김상문은 예정대로 3월 13일 신평 장날 하북면 줄다리기 대회를 빙자하여 신평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때 함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김진옥은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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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군인. 김해김씨 수로왕 69대손으로 양산시 동면 개곡리에서 출생하였다. 1941년 3월 영천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2월 건국대를 졸업하였다. 1950년 11월 25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8사단 10연대장을 거쳐 1972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33사단장 재임시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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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8년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으로서 민족 사상 고취 및 불교 연구를 목적으로 한 유심회를 조직하여 신상완(申尙玩)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김법린, 정병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유심회는 같은 해 11월 한용운의 지도를 받으면서 민족 운동 단체로 발전되었다. 1919년 2월 말에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독립선언문」을 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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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 서병희 의병부대 3초십장 정한수의 대원으로서, 경상남도 일대를 무대로 크게 활약하였다. 서병희 의병장은 1907년 음력 11월 허위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한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1907년 음력 12월 28일 해산군 51명을 인솔하여 경상남도로 잠입하였다. 또한 경주군 산내면의 윤정의와 제휴하여 울산군 복안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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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별명은 두전(枓全)·두희(枓熙)이고 국적은 북한이다. 김약수는 휘문의숙, 경성공업학교와 니혼[日本]대학 사회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 운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상무간사를 맡았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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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였다. 이후 불교 전문 강원을 다니면서 서울에서의 3·1운동에 범어사 대표로 김법린, 김상헌,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범어사 만세 운동 때 주동자로 체포되었다가 연행 중 차상명과 탈출하였다. 다음날 다시 만세 의거에 참여한 후 동래경찰서에서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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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가. 김영병은 1952년 동아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한국해외개발공사 전무이사를 지냈다. 1966년 경제담당 무임소장관의 경제담당 보좌관(차관급)을 맡았고, 1968년 민주공화당의장 보좌역과 민주공화당 훈련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제7대 민주공화당 김해지구 당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71년 제8대 국회의원(김해,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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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1912년 양산군 동면 석산리에서 태어난 김외득은 서울 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 시위 운동을 펼쳤다. 이 사건으로 구류 15일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에 가입, 소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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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0년 진주농림학교 2학년 재학 중 기숙사 학생 48명으로 구성된 토론 연구회의 회장을 맡아 3·1운동 당시의 진주 읍민과 진주농림학교 학생들의 활약과 항일 독립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1920년 5월 29일 동급생 문위동(文渭東), 신영안(申英安) 등과 모의하여 제2차 진주 독립 만세 운동을 1920년 8월 30일 천장절(天長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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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인규(金麟圭)가 동래중학교 5학년이던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부산 제2상업학교 및 동래중학교의 학생 1,000여 명이 참가했는데, 일본인 심판진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일본인 학교가 우승을 차지하자 분노가 폭발하여 당시 금지곡이었던 「아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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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8년 3월 23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소년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3월 16일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탈옥시키기 위해,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의 주동자 전병건(全秉健)의 지령에 따라 300여 명의 조합원을 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검거되었다. 193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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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한독립단에서 함경도로 특파된 박경구 등과 함께 함경남도·함경북도를 한 구역으로 하는 대한청년단 연합회 함경도 의용대를 조직하여, 연락·군자금 모금·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7일 공갈 혐의와 출판법 위반으로 함흥경찰서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2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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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서울에서의 3·1운동에 참여한 오택언(吳澤彦)이 한용운의 밀지에 따라 3월 5일 「독립선언서」를 지닌 채 통도사에 도착하여 승려·유림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여, 3월 13일 신평 장터에서 장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진옥은 김상문(金祥文)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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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철수의 호는 청제(淸齊)이다. 기장초등학교 등을 거쳐 1913년 부산 제2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7월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 입학하여 유학생 모임인 재 동경 한국학생학우회에 가입하였고,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에 대표위원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윤창석, 서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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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31년에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에 최달수(崔達守) 등의 권유로 소년부에 가입하였다. 1932년 3월 15일 양산경찰서에서 ‘소작료 4할 결의’를 하였다는 이유로 조합원 간부 17명을 구류 처분하자, 전병건(全秉健)의 지시에 따라 16일 조합원 300여 명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김태근도 주동자 김장호(金章浩) 등과 함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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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활동한 국회의원. 김택수는 1926년 9월 10일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1946년 경남고등학교, 1952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경남수직공업주식회사 전무, 경상남도 체육회 회장, 경일중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제3공화국 출범 당시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년 김해 지역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당내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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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형기는 1919년 1월부터 재경성 의학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이에 김형기는 각급 학교 대표들과의 모임을 통하여 학생들의 결속을 공고히 하였다. 2월에는 민족 대표 중 한 사람인 이갑성에게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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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군인. 김현택은 1928년 출생하였으며, 부산해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1949년 3월에 부산수산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50년에는 육군에 입대하여 1950년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72년 육군 대령으로서 육군화학기지창 창장을, 1974년에는 육군화학학교 교장을 지냈다. 1974년에는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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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국어학자이자 교육자. 1917년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신전리에서 나기언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연습과에 진학하였다. 23세에 동래 유락초등학교 훈도로 취임한 후, 부산·경상남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1959년 경남방언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0월에 부산국문법연구회를 조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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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의 남정을 파악한 고문서. 작성처와 작성 경위 등이 불분명하다. 1882년 당시의 지방제도인 면리제를 고려하면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작성하여 상급 기관인 면과 군에 보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표지에 ‘상북면소토리임자식남정성책’이라 기록되어 있고, 본문 머리에는 ‘광서 8년(1882년) 3월 소토리 임자식 남정성책’으로 기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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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벌어진 운동. 경상남도 양산 지역은 선각자들의 비밀결사운동 관련을 시작으로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의 신평 의거, 3월 27일의 양산읍내 의거, 이후 1920년대의 청년운동·신간회운동·소년운동·부인회운동·근우회운동, 1930년대 전반기의 혁명적 농민운동, 1941년의 학생운동 등이 계속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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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으로 일제에 저항한 인물들. 양산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은 1919년 3·1운동 이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윤현태와 같은 선각자들이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만큼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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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고종 40) 명례궁에서 작성하여 경상남도 양산군청에 발급한 완문(完文). 완문은 주로 관청에서 향교·서원·단체 또는 개인에게 발급한 것이다. 완문의 기능은 어떠한 사실을 확인해 주거나, 권리와 특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일종의 인준(認准) 문서이다. 이 「명례궁완문」은 1903년에 명례궁에서 작성한 완문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말기 경상남도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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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6년 박경영(朴瓊榮)과 김남이(金南伊)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심금순(沈今順)과 결혼하였으나, 사별한 후 최명이(崔名伊)와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947년경부터 양산시 원동면 원동초등학교 앞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였으며, 1959년 1월 타계하였다. 박대희(朴大禧)는 일제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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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이만집, 이태련, 이영서 등이 주동한 3·1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8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들고 시위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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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민오(朴玟悟)는 경성 불교중앙학림에 유학중이던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신상완 등과 함께 전도승려의용군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유력 승려를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파견시키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김법린 등과 『혁신공보』라는 신문을 발행하여 각지로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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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삼도는 1919년 3월 12일 친구 엄주태가 부산 동래고보 만세 시위에 참가한 후 양산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 시도를 제안하자 이귀수·정주봉 등과 함께 거사일과 거사 진행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27일인 양산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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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세민(朴世玟)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하북면사무소에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3일 하북면사무소 뒤편 신평 장터에서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 공약서, 경고문 등을 배부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였다. 당시 박세민은 만세 운동 주동자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또한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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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닌 박영주(朴永珠)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김영규·차상명 등 7명과 함께 범어사 자체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거사일을 1919년 3월 18일 동래읍 장날로 정했다. 예정된 날이 오자 1919년 3월 18일에서 다음 날인 19일 까지 이틀간 동래시장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이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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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임갑(朴壬甲)은 1902년 아버지 박도전(朴道銓)과 어머니 문지순(文池順)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양서경(梁瑞慶)과 결혼하여 양산시 남부동에서 정미소를 경영하였다. 1990년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타계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당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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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9월 경상남도 양산 인근에서 보도연맹에 소속된 민간인들을 군경에서 살해한 사건. 한국전쟁이란 급박한 상황 속에서 과거 좌익계 인물들을 영구히 제거할 목적에서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살해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초기 과거 좌익에 관계되었던 인물들이 북한군과 동조할 수 있을 것이란 추정 아래 군경에 의해 보도연맹 소속원들이 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 문제와 무관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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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장. 서병희는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의병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여 1909년에는 의병장이 되어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고 교전하였으며 군자금을 모집하고 때로는 일본 상인을 사살하는 등 항일 의병 활동을 펼쳤다. 서병희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군대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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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건(徐尙鍵)은 1915년 양산공보를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 직후 경성에서 『혁신공보』를 발행하던 박민오(朴玟悟)의 권유로 대동단에 가입하였다. 서상건은 대동단으로부터 제2차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라는 밀지를 받고 진주·하동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에 김덕봉(金德峰)·김봉길(金鳳吉) 등과 함께 1921년 5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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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양산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1989년 2월 2일 생을 마쳤다. 서장주는 일본의 도쿄고등공업학교 재학 중이던 1942년 1월에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여 독립 투쟁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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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헌준(徐憲俊)은 1901년 10월 7일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매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일등 원종 훈신 서몽호를 선조로 둔 서헌준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났다.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 때는 기회를 얻지 못하여 행동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운동이 뜻하는 바를 안 서헌준은 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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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손군호는 1901년 9월 24일에 경상남도 양산군 웅상면 평산리(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손군호는 신학문을 배워야만 우리나라도 문명화가 빨리 되겠다는 생각에 보통교육과정의 명정학교와 중등교육 과정의 지방학림이 있던 범어사를 찾아갔다. 집과의 거리가 수십 리 원거리이었기에 범어사에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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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군수를 역임했던 행정가. 손찬조는 1925년 서울 중동학교 1년을 중퇴한 후 1926년 면서기 시험에 합격하여 고향인 경상남도 울산 삼동면 서기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총독부 산하에서 경상남도·부산시 등에서 근무하였다. 1950년 9월 23일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 4일까지 재임하다가 김해군수로 전임하였다. 양산군수 재임 중에 양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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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신간회 양산지회. 양산청년동맹의 청년 운동가들과 양산 지역의 양심적 지주 계급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 양산지회를 설립하였다. 1927년 5월 반제 통일 전선체로 좌우익 합작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동년 11월 양산청년동맹을 결성한 주요 청년 운동가들은 곧바로 신간회 양산지회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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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 출신의 청년 운동가이자 정치가.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의 하북초등학교와 통도중학교(보광중고등학교의 전신)에 이어 건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양산군지부 발기결성 청년부장 및 대한독립촉성 하북면 청년연맹 발기결성 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대한청년단 양산군지부 부단장과 양산군 하북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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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신정균(申正均)은 중앙 불교전문학교와 일본 구택대학을 졸업한 후 1934년 4월 1일 양산 통도중학교 개교와 함께 교사로 임명되어 동양사·일본지리·영어·체조 과목을 담당하였다. 김말복·조병구·배기철과 함께 일제의 한국 강점의 부당성과 국제 정세 등을 교육하였다. 1941년 8월 31일 전라남도 선암사에서 온 유학생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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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한 사기장(沙器匠). 신정희는 1930년 8월 29일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나 부산 지역에서 골동품 행상과 수집상으로 생활하면서, 전국의 오래된 옛 도요지 200여 곳을 탐사하여 깨진 그릇 조각을 수집하였다. 이것을 통해 태토와 유약을 분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68년에 자연 유약으로 진주 지방의 제기였던 황도사발(黃陶沙鉢)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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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운동단체. 신흥동우회는 첫째, 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 건설 둘째,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해방운동 촉진 셋째, 약자 단결의 의의를 천명하여 상호부조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사상 단체들이 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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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상옥은 경상남도 양산시 하서면 내포리(현 원동면 내포리)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때 38세였다. 양산에서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많은 애국 인사들이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순모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각지를 순방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회의에 보낸 소위 파리장서 사건에 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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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심상욱(沈相郁)은 1881년 아버지 심량택(沈亮澤)과 어머니 손경순(孫庚順)의 장남으로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우초(友焦)이다. 한학을 수학하고, 토곡산에서 은신술과 축지법을 통달하면서 수도하였다. 1911년 박민화(朴珉和)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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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梁山邑) 장날을 이용하여 엄주태(嚴柱泰)·김동건(金東健)·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 22일 부산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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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의병이자 효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순장(舜章), 호는 율농(栗儂). 계산 안우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만성재(晩惺齋) 안평중(安平重)이며, 아버지는 안효필(安孝弼)이다. 부인은 동래정씨이며, 아들은 안종석(安鍾石)이다. 안병원은 1882년(고종 19)에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안병원은 효자로 이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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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안상수(安上水)는 1879년 아버지 안덕진(安德振)과 어머니 김재일(金在日)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순악(金順岳)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1939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교리에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 양산의 항일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양산농민조합의 양산경찰서 습격 사건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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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약한 지역 문화 연구 및 운동가. 안종석(安種石)은 광복 직후 민족 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고, 양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노력을 기울여 시민의 문화 의식 향상과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안종석은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가 점차 좌파 중심의 인물들로 운영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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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명호(梁明浩)는 1870년 아버지 양갑주(梁甲柱)와 어머니 오분출(吳分出)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18년 김순등(金順登)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으며, 1946년 타계했다. 양명호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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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자생적 정치 조직. 양산건국준비위원회는 갑작스런 일제의 패망으로 양산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 행정, 사회, 치안, 교육 등의 시급한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관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전국 곳곳에서 각 지역별로 치안을 담당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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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16일 일본 경찰의 양산농민조합 탄압에 맞서 조합원 및 가족들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 양산농민조합은 1931년 10월 소작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10가지 요구 조건을 지주에게 제시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3월 농번기를 맞이하여 지난해 10월 지주들에게 요구했던 10가지의 요구 조건을 재차 권고하였다. 이에 사태의 확산을 우려한 양산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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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여성단체. 양산부인회는 지역 주민들의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권은해·배기영·김진자·곽인순·엄양필·배순이·배숙진·김성이 등이 주축이 주축이 되어 1922년 8월 30일 양산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양산부인회의 대표적 활동은 야학 운영, 유치원 운영, 상호 부조, 수제의연금 모집 등이었다. 1922년 9월 여자 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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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소년단체. 양산소년동맹은 1922년 호남 지방에 극심한 홍수가 발생했을 때 수재민돕기와 기근 구제 활동을 벌였던 양산소년단이 모태가 되었다. 1927년 7월 조선소년연합회가 결성된 데 영향을 받은 양산청년동맹은 항일운동의 차세대를 양성하기 위해 동년 12월 11일 양산불교소년회와 양산청년회 소년부 등의 두 조직을 통합하여 양산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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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결성된 청년단체. 양산청년동맹은 역사적 필연으로 전개될 신사회 건설 역군을 양성하고, 단결로서 무산대중의 당면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며 조선 대중의 정치적·경제적·민족적 이익 획득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양산청년동맹은 조선 청년동맹에서 주장한 ‘전 민족적 청년운동노선’에 발맞추어 1927년 10월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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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춘도(楊春到)는 1902년 아버지 양경률(楊敬律)과 어머니 고상남(高尙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내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에 출가하여 명정학교를 다니면서 승적(僧籍)을 가졌다. 1937년 박무금(朴武今)과 결혼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양춘도는 1919년 3월 18일 동래시장 만세 운동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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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엄주태(嚴柱泰)는 1919년 3월 27일 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과 같이 독립 선언문(獨立宣言文)과 경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할 것을 협의하고 200여 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양산읍(梁山邑) 장날에 운집한 3,000여 민중에게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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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엄주화는 1919년 3·1운동 당시 양산 지역의 독립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양산 지역의 문화 진흥과 산업 진흥을 목표로 결성된 양산청년회에 김철수(金喆壽), 금석호(琴錫浩), 최학선(崔學鮮) 등과 함께 임원으로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하였다. 양산청년회는 창립 직후부터 양산 지역 각 면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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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터에서 일어난 양산읍 만세 운동에 이어 이귀수 등과 함께 모의하여 양산읍 2차 의거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 2,000여 군중이 모여들자 유경문은 이귀수와 함께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양산군청과 헌병 분견소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항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공포탄 발사와 총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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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농민조합 간부. 윤복이는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31년 4월 4일 양산농민조합이 결성되자 조합원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일본인 및 한국인 대지주들을 압박하면서 소작 조건을 혁신하기 위한 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24일 제3회 농민조합회의에서는 경작권 확립의 건, 최저임금 제정에 관한 건 등을 결의하고,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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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수만(尹守萬)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에 항거하였다. 1932년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여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윤수만은 이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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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육영사업가.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경운(耕雲). 현감 윤홍(尹洪)의 아들이다. 형은 고성군수와 울산군수를 역임한 윤명은이며, 사촌으로 양산 지역 출신의 윤상은과 윤현진 등이 있다. 윤영은은 1907년(순종 1)에 문중의 재산으로 구명학교(龜明學校)[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2동의 구포초등학교]를 창립하였으며, 1908년(순종 2)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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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성서(成瑞). 진사 윤소(尹沼)의 7세손이다. 윤소는 1631년(광해군 5)에 진사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윤창응은 고종 때에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1898년(고종 35)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고, 1907년(순종 1)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의정부총무국관보과(議政府總務局官報課)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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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현진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구(明九), 호는 우산(右山)이다. 7세 때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지역 만성재서숙(晩惺齋書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5세 때인 1907년에 숙부 윤상은(尹相殷)이 설립한 구포의 사립 구명학교(龜明學校)를 1회로 졸업하였다. 17세 되던 1909년에는 중국의 난징,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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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개득(李介得)은 190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永)과 어머니 권보배(權寶培)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김복쇠(金福釗)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며, 1973년 양산시 북정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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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군수를 역임했던 행정가. 이계형(李啓亨)은 1924년 5월 30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월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44년 3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8월부터 1951년 5월까지 경상남도 밀양 부북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후 밀양군·양산군·동래군·창원군 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진주부시장과 마산부시장을 역임하였다.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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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제1차 양산의거에 엄주태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함께한 사람들은 대거 피검되었으나, 이귀수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류경문과 함께 제2차 양산의거를 모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양산장에서 2,000여 군중을 동원하여 제2차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양산군청과 헌병분견소로 진격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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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규린(李圭麟)은 1856년 아버지 이하찬(李夏燦)과 어머니 박용당(朴用堂)의 차남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에 능통하여 유학자로 이름이 났다. 1927년 박수(朴銖)와 결혼하였으며, 1937년 양산시 주남동에서 타계하였다. 이규린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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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규홍(李圭洪)은 1893년 아버지 이재영(李宰榮)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차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농(白農)이며, 자는 도숙(道淑)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13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9년 5월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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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주는 경상남도 양산 지역의 공립 원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7년 선배인 윤현진에게서 감명을 받아 상경하여 3·1운동의 준비를 도왔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기주는 고향으로 돌아와 3·27 양산의거에 참여하였다. 1920년 양산청년회가 결성되어 김철수가 회장이 되고, 이기주는 간사장이 되어 고향 청년들에게 민족사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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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 말기 경상도 암행어사 이도재(李道宰)의 덕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1883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이도재는 양산 지역에 와서 청렴을 지키는 가운데 돈을 내어 둑을 쌓아 재난을 방지하는 등 공적을 쌓았다. 이를 양산 백성들이 결코 잊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비석을 세웠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 앞 비석군 왼쪽 비석군의 뒷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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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양산군수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이황의 11세손이다. 아버지는 대사성 이휘준(李彙濬)이며, 이휘철(李彙澈)에게 입양되었다. 1866년(고종 3) 정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다. 이후 홍문관부수찬·장령·지평·병조정랑·교리·응교·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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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만춘(李萬春)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만춘은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만춘은 이 일로 검거되어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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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봉재(李鳳在)는 대구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공산주의자 장적우(張赤宇)에게 포섭되어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사유 재산을 없애고 공산주의를 실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27년 12월 대구부 남산정에서 평양형무소에서 출감한 고려공산청년회 경상북도 책임자 장적우 등의 강의를 듣고 신우동맹을 결성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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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 당시 부산진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양산 지역에서는 엄주태(嚴柱泰)의 주도 아래 이상환·엄주태·전병건(全秉健)·박삼도(朴三道) 등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출동한 일경에 의해 엄주태·전병건·박삼도 등이 체포되었으나, 1차 시위 때 검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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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석윤은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사기리 석왕사(釋王寺)에서 승려 생활을 하였고, 호은대사(虎隱大師)의 제자였다. 1919년 5월부터 신상완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여 배부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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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원희(李元熙)는 1914년 아버지 이의문(李義文)과 어머니 류복금(柳福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다방동에서 태어났다. 1929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공립제2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서울의 대동상업학교(현 대동정보산업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1939년 조복조(趙福助)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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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에 있는 조선 말기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을 기리는 영세불망비.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 영의정이 된 이유원이 덕치에 힘써 양산 고을 백성들이 온전히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양산시 교동에 있는 양산향교 앞 양쪽 비석군 가운데 왼쪽 비석군의 뒷줄, 정문 담장으로부터 5번째에 놓여 있다. 비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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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희우(李禧佑)는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였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탈환 작전에 가담하였다. 이희우는 다른 조합원과 함께 양산경찰서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희우는 이 일로 검거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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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수만(林壽萬)은 1903년 아버지 임갑이(林甲伊)와 어머니 김소임(金小任)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조봉아(趙奉兒)와 결혼하여 2남 6녀를 두었으며, 1992년 김해시 삼방동에서 타계했다.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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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교동 양산향교 앞에 있는 조선 말기 양산군수 장태수(張泰秀)의 덕치를 기리는 영세불망비. 1869년에 양산군수로 부임한 장태수는 곡식을 내어 묵정밭을 일구었고, 창고를 열어 세금을 덜어주었으며, 군기를 정비하고 별포군을 기르는 등 국방에 힘썼다. 이에 따라 양산 지역이 완전한 모습이 갖추어가던 1870년 갑자기 장태수가 헌납(獻納)의 벼슬을 제수받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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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혁이라는 별칭이 있다. 전병건은 엄주태 등과 함께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을 기해 일으킨 3·27양산의거를 주도하여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1년부터 양산청년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제6회 총회 때 집행위원으로 피선되면서 양산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결성된 양산청년동맹의 제2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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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정선(旌善). 병한(秉翰)은 별명이고, 본명은 전병익(全秉翼)이다. 전병한은 1915년 3월 25일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제3회), 엄주태(嚴柱泰)·서상근(徐相根) 등이 동기생이다. 엄주태·전병건(全秉健)이 주도한 양산만세운동의 모의에 동참하여,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을 기해 3,000여 군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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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4월 3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교사 홍재문(洪在文)과 학생 배수원(裵守元) 등이 모의하여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8일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전봉호(全鳳浩)는 이갑이(李甲伊) 등 일신여학교 학생과 주민을 동원하여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때 전봉호는 주동 학생으로 검거되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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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석준(全錫準)은 1919년 11월 백산 안희제의 주도하에 발족된 부산 기미육영회 평의원 감사역 등으로 활약하면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고 있었다. 이후 1920년 7월 15일 양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관하여 김철수를 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양산청년회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921년 4월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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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 활동하다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 정착한 노동 운동가. 전세집(全世執)은 1894년 함경남도 원산부 명석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월남하여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에 거주하였다. 1929년 원산부 원산노동연합회의 노동자들이 동맹 파업을 결행하자 일본 자본가들이 일제 어용 단체인 함남노동회를 동원하여 파괴 공작을 자행하였다. 이에 원산노동연합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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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이풍(田二豊)은 1920년에 조직된 양산청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해오던 중 1927년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양산에서도 청년 운동 및 사회 운동 전반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 이 지역의 주도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 1927년 6월의 긴급 총회를 통하여 양산청년회의 기존 간부들이 총사직함과 동시에 전이풍이 김기오(金基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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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규영(鄭圭永)은 1883년 아버지 정순용(鄭淳鎔)과 어머니 백아지(白牙只)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어곡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윤석(胤錫)이며 호는 낙산(洛山)이다. 한학을 배우고 낙산한의원을 경영하였다. 1909년 2월 변봉련(卞鳳連)과 결혼하였으며 부산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다 1959년 타계하였다. 묘지는 화룡 가마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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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기옥(鄭冀鈺)은 1906년 아버지 정재관(鄭在瓘)과 어머니 김복림(金福林)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1929년 이명련(李命連)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으며, 1999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타계했다. 1932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하다 구속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를 구출하는 작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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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주봉(鄭周奉)은 1901년 아버지 정갑룡(鄭甲龍)과 어머니 정아기(鄭兒其)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1년 김갑선(金甲先)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 이후인 1944년에는 배희이(裵喜伊)와 재혼하였다. 1959년 3월 30일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서 타계하였다. 정주봉은 1919년 3월 경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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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이명(異名)은 정지태(鄭志泰)이다. 아버지는 정대종(鄭大宗)이다. 1892년(고종 29)에 왕실의 친척과 외척을 위한 예우 기관인 돈녕부(敦寧府)의 도정(都正)을 역임하였고, 1902년(광무 6)에 가선(嘉善)에 승진하였다. 상인들이 그의 업적을 기려 혜상생사각(惠商生思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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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의원. 정진근은 상북보통학교와 서울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 정경과를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시절 독립운동 학생모임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아버지 정순모(鄭舜謀)와 상의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헌납하였다. 이후 독립자금 헌납 사실이 탄로나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동문이며 독립운동 동지인 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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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진영(鄭鎭永)은 1916년 아버지 정원모(鄭原謨)와 어머니 박인수(朴因洙)의 아들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1년 정순임(丁順任)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1982년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서 타계했다. 정진영은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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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지역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 속에 청년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양산에서도 1920년 7월 양산청년회가 출범하게 되었고 정진호(鄭進浩)도 양산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1926년 11월의 방향 전환론의 제창과 더불어 이듬해인 1927년 2월 15일에 신간회가 결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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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의 독립운동가. 조병구는 일제시대 통도사에 있으면서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펼쳤다. 당시 통도사 종립학교였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순지리의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전신)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역사와 국체를 부인하고, 우리민족사와 언어·문학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배일사상과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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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군수를 지낸 행정가. 1946년 진주중앙초등학교, 1952년 함안농업고등학교, 1956년 서울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6월 하동군에서 기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서 밀양군, 김해군, 경상남도청에서 근무한 후 1975년 5월 산청군수에 부임하였다. 1976년 4월 1일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1978년 7월 31일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울주군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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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정치가이자 경제인. 지영진은 서울 보성중학교 2년 중퇴 후 청년기에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다. 1928년 김철수(2대 경상남도지사, 도쿄 2·8 독립운동 주도) 등의 주도로 창립한 신간회 운동에 동조하여 1929년 2월 20일 신간회 양산지회 임시집행부 부회장을 맡았으나, 그 이듬해 5월에 신간회 양산지회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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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지용준(池龍俊)은 1894년 아버지 지재연(池載演)과 어머니 박치숙(朴致淑)의 막내로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범어사로 출가하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승적을 가졌으나, 1924년 김기장(金琪莊)과 결혼하였다. 해방 후 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2동의 동장을 역임하였다. 금정중학교의 범어사 3·1운동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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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차상명(車相明)은 1895년 아버지 차인수(車仁守)와 어머니 이수년(李守年)의 장남으로 동래군 동래면 교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범어사에 들어가 명정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 최학전(崔學傳)과 결혼하여 외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945년 부산시 동래구 남산동에서 타계했다. 서울에서 거족적인 3·1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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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달수(崔達守)는 1916년 아버지 최성운(崔聖運)과 어머니 이금옥(李今玉)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1932년 김기출(金己出)과 결혼하여 4남 4녀를 두었으며, 1962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서 타계했다. 최달수는 1931년 4월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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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학선(崔學鮮)은 3·1운동 전후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양산청년회 운동·신간회운동·농민조합운동 등의 항일 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함으로써 ‘독립할배’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1918년 일본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윤현진이 설립한 의춘상행(宜春商行)이란 소비조합에 참여하였으며, 1919년 3월 윤현진으로부터 의춘상행을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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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경상남도 양산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인 사창(社倉)의 하나. 우리 나라에서 사창이 처음 실시된 때는 1451년(문종 1)이었다. 사창은 고려시대부터 설치해온 의창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실시하였다. 즉, 원곡의 부족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군자곡의 감소를 막자는 데 있었다. 농민에게 환곡 정책의 일환으로 대여했던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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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한동선(韓東善)은 1915년 아버지 한암외(韓岩外)와 어머니 손숙이(孫淑伊)의 장남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에서 태어났다. 1928년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9년 김차열(金次烈)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1966년 타계했다. 한동선은 1931년 4월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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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함성관(咸成寬)은 1931년 4월 창립한 양산농민조합의 조합원으로 가입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고율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 구속 간부의 구출 작전에 다른 조합원과 함께 가담하여 정문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경찰서로 진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1932년 부산지방법원에서 벌금 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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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부터 현재까지의 경상남도 양산시 역사. 1945년 8월 18일 양산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산하 치안대는 양산경찰서를 접수하여 치안 확보에 주력하였다. 8월 22일 일본인 경찰서장 이와나가[岩永]는 치안대원을 감금하는 등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귀국을 걱정한 일본인들의 노력으로 한국인의 치안대는 양산경찰서를 재차 접수하여 자율적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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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홍인범(洪仁犯)은 1931년 4월 4일 창립된 양산농민조합의 일원으로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적극적인 농민 운동을 펼치다 1932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2년 2월 20일 양산농민조합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및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의 내용을 결의한 것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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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황만우는 범어사에 있는 중등학교 과정의 지방학림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범어사 학생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학생 40여 명은 3월 18일 밤, 동래읍 서문(西門) 부근에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 황만우 등 10여 명의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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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항일운동가. 황소준(黃小俊)은 일제강점기 소작 관행을 혁신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양산농민조합의 간부이다. 1932년 2월 20일 양산농민조합이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소작권 영구 확립, 지세 및 기타 공과금 지주 부담, 소작료 4할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4일 양산농민조합의 조직부장 이봉재(李鳳在) 일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