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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07
한자 權泰源
영어공식명칭 Kwon Taewon
이칭/별칭 원경(元卿)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10월 10일연표보기 - 권태원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2년 3월 - 권태원 구세군사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권태원 해주 구세군 사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권태원 지품면 낙평리 구세군 지영 교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권태원 구세군 참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권태원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권태원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5일 - 권태원 진보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7년 9월 15일연표보기 - 권태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권태원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권태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25일 - 진보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제학교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구세군사관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병곡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구세군 참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권태원(權泰源)[1891~1967]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경(元卿)이다.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권영유(權永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권태원은 일찍이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에 있는 사립 대제학교(大濟學校)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12년 3월 경성에 있는 구세군사관학교(救世軍士官學校)를 졸업하고, 황해도 해주에서 구세군 사관(士官)을 역임하였다. 1916년 고향 낙평리에 있는 구세군 지영(支營)의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1917년에는 구세군 참위(參尉)가 되었다. 그러나 일신상의 사정으로 1919년 2월 사직한 뒤 지품면 낙평리에 머물렀다.

1919년 3월 12일 권태원은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으로부터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만세시위와 파리 강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 채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4일 송천리의 친척 권유동(權有東)을 찾아가 만세시위운동에 관해 논의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송천리 장로교 예배당의 조사 정규하(丁奎河)를 찾아가 김세영으로부터 들은 국내외 정세를 전한 뒤, 3월 18일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6일 권태원정규하와 함께 창수면 인량리의 권상호(權相浩), 송천리의 남효직(南孝直), 괴시리의 남여명(南汝明) 등에게 영해시장 만세시위 계획을 말하였다. 권태원김세영·정규하 등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권(權)·남(南)·백(白)·이(李)·박(朴) 등 영덕의 명망 있는 향반(鄕班) 가문의 인사들을 설득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권태원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 군중 2,000여 명을 선도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 및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일제의 통치기구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그리고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또한, 시위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 시게요시손[茂義孫]을 비롯해 순사 및 순사보 4명을 폭행하고, 또 본서로 철수하는 일본 순사들을 추격하였다.

오후 2시경에 이르러 권태원 등은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병곡면 병곡리로 이동하였다. 시위 군중에 여러 사람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400~500명이 되었다. 권태원은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병곡주재소·병곡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平海)에서 증원된 일본 헌병 3명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군중들의 희생을 염려한 정규하의 설득으로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3월 19일 영해·병곡·창수·영덕·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무력 진압과 탄압으로 시위 군중은 강제 해산되었다.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시작되는 가운데, 권태원은 청송군 진보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3월 25일 일어난 진보면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권태원은 6월 5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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