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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63
한자 金時讓
영어공식명칭 Kim Siyang
이칭/별칭 자중,하담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소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1년연표보기 - 김시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5년 - 김시양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김시양 영해로 이배
활동 시기/일시 1634년 - 김시양 병조판서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김시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2년 - 김시양 '충익' 증시
출생지 충청북도 괴산군
유배|이배지 영해도호부 - 경상북도 영덕군
묘소|단소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영덕으로 유배 온 문신.

[가계]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초명은 김시언(金時言)이다. 증조부는 김언묵(金彦默)이며 조부는 김석(金錫)이다. 아버지는 비안현감을 지낸 김인갑(金仁甲)이며, 어머니는 홍이곤(洪以坤)의 딸 남양홍씨(南陽洪氏)로 1581년(선조 14)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출생하였다. 부인은 이대수(李大遂)의 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아들은 김휘(金徽)이다.

[활동 사항]

김시양은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를 지내면서 시사(試事)를 관장하였는데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범하여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났다. 이후 관직은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1636년에는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김시양은 광해군 연간 종성에 유배되었는데, 1616년(광해군 8)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북방 유배지에 있던 인사들이 대거 남쪽으로 옮겨지게 되자 그 역시 영해도호부로 이배되었다. 영덕 유배 당시 원구리 서재골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시양이 쓴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 따르면, 1622년 영해에 있을 때 참새가 부엉이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김시양은 유배지에서 여러 문인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권경(權璟)[1604~1666]·남필대(南必大)[1608~1666] 등이 있다. 특히 김시양권경을 재상이 될 재목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질녀와 혼인하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하담집(荷潭集)』, 『부계문기(涪溪聞記)』, 『자해필담』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자해필담』은 영해도호부 유배 생활 중 쓴 책으로, ‘자해(紫海)’는 영해의 옛 명칭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인·현인·악인 등과 관련된 각종 기담(奇談)이 얽혀져 있다.

[묘소]

김시양의 묘는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시양은 1692년(숙종 17) 충익(忠翼)으로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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