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22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발발
전개 시기/일시 1592년 7월연표보기 - 임진왜란 영덕 지역 전투 발생

[정의]

1592~1598년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비롯해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일본은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림]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1598년(선조 31)까지 7년간 전쟁이 진행되었다.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을 이루는 조선 시대 영해부(寧海府)영덕현(盈德縣) 지역은 일본군이 북진하는 주요 진격로에서 비켜나 있었다. 그렇지만 전란 초기부터 영덕·영해 지역 인사들은 정규군과 의병으로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또한, 전장이 확장되면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에도 일본군이 침공하자, 영덕·영해 지역에서는 관민이 함께 일본군과 맞섰다.

[역사적 배경]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좌·중·우로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였다. 삼로로 나누어 북진한 일본군은 5월 3일 한양을 함락하였다. 전란 초기에 일본군은 한양의 함락을 위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진격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의 진격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의병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전후방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일본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한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8도를 분담하여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도를 분담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6월 12일 개령에 일본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고, 주변을 공략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일본군의 진격로에서 벗어났던 영덕 지역은 전란 초기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군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경과]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관군 및 의병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을 무찌른 영덕·영해 지역 출신 인사들도 많았다. 1592년 4월 14일에 있었던 부산성 전투에서 영덕현 출신의 장희식(張希栻)이 정발(鄭撥) 장군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참전하였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외에도 관군으로는 경주부 판관으로 경주성 수복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해도호부 출신의 박의장(朴毅長), 하양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박홍장(朴弘長), 영해의 남의록(南義祿), 영덕 출신의 영일현령 김난서(金鸞瑞),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사한 영해 출신 김제군수 정담(鄭湛) 등이 있다.

의병을 일으킨 인사로는 찰방 조현(趙玹), 생원 이함(李涵), 유학 백현룡(白見龍) 등이 있다. 이들은 곽재우의 화왕산성 의진에도 합류하여 일본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영덕과 그 인근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1592년 5월 3일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일부는 강원도로 침입하여, 연안을 따라서 일부는 함경도 안변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평해를 거쳐 경상도로 침입하였다. 이렇게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하여 전 성균관전적 류종개(柳宗介)의 의병부대가 봉화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였으며, 류종개 이하 군졸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이 기세를 타고 일본군은 평해 백암을 지나 영해의 서쪽 지역인 오늘의 창수면 삼계리수리 쪽으로 진격해 왔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김수(金睟)의 막료였던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 7월 25일자 장계에 "영해·영덕 … 등 14관(官)은 적이 침범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왜군이 강원도로부터 내려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병사(兵使)와 영해부사가 적절한 지역에서 매복하여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당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좌감사(左監司)의 장계(狀啓)에는 "좌도에서 6월 10일 후로 … 영해·영덕 등의 10여 읍은 적이 침범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 안동·예안·봉화는 적이 침입하였고, 또 강원도에서 내려온 왜군이 영해부를 함락하였으니, 그 나머지 연해의 읍도 모두 영해부와 같은 지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군이 영해 경내에 들어온 것은 1592년 7월 25일에서 8월 초 사이로 추정된다. 당시 영덕·영해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지휘관으로는 영해도호부사 한효순(韓孝純)과 영덕현령 안진(安璡), 그리고 축산포만호 오사청(吳士淸)이었으며, 영해도호부사 한효순은 영해 전투에서의 공로로 1592년 8월 7일에 경상좌도 관찰사로 특진하였다.

한편 영해전투에는 백인국(白仁國)·신규년(申虬年)·배태원(裵泰元) 등 지역의 많은 의병들이 참전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함께 창수면 위정골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지만, 뒤이어 내려온 왜의 대군에 포위되어 신규년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그 외에도 영덕 출신의 김기하(金器夏)·김성하(金成夏) 형제는 정유재란 당시 울산 서생포로 가는 창암에서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와 함께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지만 이때 김기하는 전사하였다. 또한, 대구의 공산성 전투에서는 영해 출신인 이함(李涵)·백인경(白仁鏡) 등이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한편 정유재란 당시 영해와 영덕의 많은 인사들이 곽재우의 화왕산성 의진에 참가하였다.

[결과]

임진왜란으로 영덕·영해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군사제도가 개편되면서 기존에 수군만호가 주둔하던 수군진영이 축소 및 폐쇄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으로 참전하였던 재지사족 가문의 인사들이 전후 복구사업을 주도하면서 향촌사회에서의 지위를 한층 더 굳건히 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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