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릉의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36
한자 寧陵義陣
영어공식명칭 Yeongneung Righteous Army
이칭/별칭 영해의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 3월 13일연표보기 - 영릉의진 창의
해체 시기/일시 1908년 11월 18일연표보기 - 영릉의진 해체 및 신돌석 순국
최초 설립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부대
설립자 신돌석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창의한 의병 부대.

[개설]

영릉의진(寧陵義陣)은 1906년 3월 13일 평민 출신인 신돌석(申乭石)[1878~1908]이 조직하였다. 1908년까지 경상도 북부 지역과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평민 출신의 신돌석영릉의진을 조직하였다. 당시 진호(陳號)를 ‘영릉’이라고 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영릉의진의 주된 작전은 강원도로 북상하여 경상도 울진(鬱珍)과 강원도 삼척(三陟)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영릉의진의 작전은 1906년 4월부터 9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일본의 동해안 어업 침탈과 일본인의 이주 정책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각지의 관아(官衙)를 공격하여 전투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한 뒤, 삼척과 울진을 공략하여 일본의 동해안 어업 침탈의 전초기지를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변천]

영릉의진의 활동 시기는 1906년 4월부터 1907년 9월까지의 전반기, 1907년 9월부터 1908년 9월까지 후반기로 나뉜다. 전반기 활동 중심지는 경상도 영양(英陽)·청송(靑松)·영해 지역이었으나, 후반기에는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태백산맥으로 바뀌었다. 의진 규모는 전반기에는 100~400명 정도의 대규모 부대로 움직였으나, 후반기에는 산악전을 치르기 위해 20~5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로 운영되었다. 활동 시간은 전반기에는 대낮에도 활동할 수 있었으나, 후반기에는 주로 야간에 활약하였다. 숙박도 전반기에는 주로 민가를 이용하였지만, 후반기에는 토벌대의 정찰을 피해 거의 산중에서 이루어졌다. 의진 구성원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농민이었지만, 동몽(童蒙), 전직 주사, 사족, 유생 출신들도 있었다. 무기는 대개 화승총이었고, 노획한 양총도 일부 사용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릉의진은 1906년 3월 13일 신돌석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집 근처에서 조직하였다. 지휘부는 대장 신돌석 이하 참모장 박수찬(朴壽燦)·김병두(金秉斗), 도선봉장 한영육(韓永育), 분진선봉장 전세호(田世浩)·이하현(李夏鉉), 중군장 김용욱(金容旭), 중군대장 백남수(白南壽) 등 61명으로 구성되었다.

초창기 영릉의진은 강원도 울진·삼척 방면으로의 북상을 추진하였다. 이에 1906년 4월부터 9월까지 5~6차례에 걸쳐 작전을 전개했는데, 일본인 이주지와 관아 및 우편취급소와 같은 곳을 주로 공격하였다. 1907년 이후 일본군의 토벌 작전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영릉의진은 반토벌 작전으로 대응하였다. 9월 15일 영양 동북방 20리 지점에서 일본군 수비대 제1종대(縱隊)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영양 인근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영릉의진은 지형지물을 적극 활용하면서 일본군을 교란하였다. 이후 토벌 작전 강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삼척 주둔 일본군도 울진으로 내려오고 경찰까지 총동원되었다. 1907년 11월부터 영릉의진은 일본군의 이러한 동태를 주시하면서,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기습 작전을 펼쳤다.

1908년 1월 10일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독곡(獨谷) 요새가 일본군에 탐지되면서, 영릉의진은 큰 손실을 입었다. 영릉의진은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20~5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로 분산하여 영양과 울진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런 가운데 2월 13일 일본군 제1군 사령관 야마다[山田定玄] 소좌가 영주(榮州) 수비대장 고토오[後藤] 대위를 비롯하여 8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주에 도착하였다. 2월 16일 영주경찰분서장과 야마다 소좌는 봉화(奉花)를 거쳐 예안(禮安)으로 출동하였다. 당시 영릉의진은 일월산(日月山)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일본군 토벌대 6개 종대 115명이 남북으로 길게 그물을 친 뒤, 진형(陣形)을 유지하면서 동쪽 일월산으로 몰아붙이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영릉의진은 전투를 벌이는 척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일월산을 빠져나갔다.

4월 이후 영릉의진은 평해·진보·영해 등지에서 병사와 군자금을 확보해 나갔다. 약 300명 규모로 정비된 영릉의진은 5월 30일부터 6월 1일 사이 울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8월 중순 이후 일본군이 대규모로 증원되고, ‘귀순법(歸順法)’ 실시로 투항자가 늘어나면서, 영릉의진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어 갔다. 영릉의진의 위기에 신돌석은 만주 망명까지 구상하였지만, 11월 18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서 피살되면서 영릉의진 활동도 종식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릉의진은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이끌었으나, 여기에는 상층 신분의 인사들도 적지 않게 참여함으로써, 전기의병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였다. 전 민족적 차원에서 전개된 여러 국권회복운동 가운데 영릉의진의 활동이 단연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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